충격, 소지랑물 먹고 사는 축사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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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소지랑물 먹고 사는 축사고양이 가족
- 12일간의 기록



‘소지랑물’은 축사나 외양간 웅덩이에 고여 있는 소오줌물이나 구정물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먹을 수 없는 오수이다.
그런데 이 소지랑물을 먹고 사는 축사고양이 가족이 있다.

우선 축사고양이를 처음 만난 12일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본다.
그날 나는 개울가 마을도로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걷이가 끝난 논자락 너머로 희미하게 길고양이 여러 마리가 걸어가는 거였다.
삼색 어미고양이 뒤로 4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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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고양이 가족과의 첫 대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곳에는 모두 10마리의 고양이가 대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을 이끌고 먹이 원정을 다녀오는 게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나는 녀석들의 뒤를 밟았다.
녀석들이 도착한 곳은 한우 여러 마리와 개들을 키우는 축사였다.
축사로 들어선 녀석들은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철망 속의 축사에서 일제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철망 밖에서만 기웃거리자 녀석들은 안심을 했는지
삼삼오오 흩어져 휴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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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나무더미 위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미고양이와 2마리의 새끼 고양이(위). 소와 개를 키우는 사육장 바로 옆에서 축사고양이들은 살고 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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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녀석은 쌀겨자루 위에 올라가 앉았고,
어떤 녀석은 짚과 똥이 뒤섞인 축사 바닥에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축사에는 어미고양이와 4마리의 새끼만 있는 게 아니었다.
2마리의 새끼가 더 있었고,
중고양이도 3마리나 더 있었다.
정리해보자면 어미(삼색이) 1, 중고양이(각각 턱시도, 삼색이, 노랑이) 3, 새끼고양이(삼색이 2, 노랑이 2, 턱시도 1, 잿빛냥이 1) 6.
모두 10마리의 고양이가 축사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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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료를 부어주자 녀석들은 정말 걸신들린 듯 그것을 먹어치웠다. 지난 12일 동안 나는 녀석들에게 먹이를 제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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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내가 만난 길고양이 무리 중에 가장 많은 수의 고양이를 만난 셈이다.
이 10마리의 고양이는 한가족이었는데,
중고양이는 약 5개월령 안팎으로 보였고,
새끼고양이는 기껏해야 한달 정도 밖에 안된 아기냥들이었다.
나는 차에 비상용으로 싣고 다니는 고양이 사료를 가져다 축사에 부어주었다.
이튿날 다시 축사를 찾아갔더니
어제 부어준 사료가 말끔히 없어졌다.
이번에는 10마리가 배불리 먹을 정도의 제법 많은 양의 사료를 축사 안에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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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다. 가슴이 아프다. 새끼 삼색이 한마리가 먹이를 먹고 나서 축사 웅덩이에 고인 소지랑물을 마시고 있다(위). 보다시피 이 물은 소오줌물이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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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번 보았을 뿐인데,
녀석들은 축사 여기저기서 나타나 금세 예닐곱 마리가 모여앉아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던히도 굶었던지 녀석들은 참으로 게걸스럽게도 사료를 먹어치웠다.
다만 경계심을 아직 풀지 않은 새끼 삼색이 1마리와
중고양이 턱시도 1마리는 근처를 맴돌 뿐 사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미고양이는 경계심은 없는 듯했으나
새끼들에게 먹이를 양보하려는 듯 아예 축사 바깥으로 나가
밭고랑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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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새끼 고양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유통으로 사용하던 폐타이어 혹은 플라스틱 통에 고인 청태가 잔뜩 낀 구정물을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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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내 눈을 의심할만큼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사료를 배불리 먹고 난 새끼 고양이 중 삼색이 한 마리가
축사 물고랑으로 다가서더니 소지랑물을 마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그건 소오줌물과 구정물이 뒤섞인 오수였다.
다른 고양이들의 사정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새끼 노랑이 한 마리는 소 구유통으로 쓰던 폐타이어 바닥에 고인
청태가 잔뜩 낀 냄새나는 구정물로 식수를 대신했고,
또다른 새끼 노랑이와 잿빛냥이도 커다란 플라스틱 구유통에 고인 청태 낀 구정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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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쓰레기장에는 축사냥이의 한 가족이었을 새끼 노랑이의 주검이 버려진 채 썩어가고 있었다.

녀석들은 습관적으로 그 물을 마시고 있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이 한 장면만 보아도 그동안 녀석들이 얼마나 열악하게 살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녀석들에게 묘생은 생존이 아니라 투쟁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 하나.
축사 쓰레기장에 언제 죽었는지 모를 새끼 노랑이 주검이 버려져 있는 거였다.
이미 그것은 썩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어미고양이는 7마리의 새끼를 낳았던 것같다.
그중 한 마리가 죽은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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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새끼 삼색이(위)와 먹이를 먹기 위해 축사 철망문을 빠져나오는 노랑이 한마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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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위험할수록, 사는 게 힘들수록, 묘생이 전쟁일수록
고양이는 더 많은 새끼를 낳는 법이다.
더 많이 낳아야 그 중 희박한 생존율을 이겨낼 고양이도 생길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길고양이를 학대하고 살처분할수록
길고양이의 개체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축사냥이 가족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길고양이로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거의 바닥까지 내려간 묘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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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냥이의 또다른 가족 중고양이 삼색이(위)와 어미가 자리를 비울 때 보모 노릇을 도맡아 하고 있는 노랑이 한마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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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저렇게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지난 12일 동안 나는 매일같이 축사냥이들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벌써 사료 반 포대 이상을 축사로 실어날랐다.
다행히 아직까지 녀석들은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뼈만 앙상할 정도로 바짝 말랐던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도 약간씩 좋아지고 있다.
새끼 고양이 중 삼색이 한 마리와 노랑이 한 마리, 잿빛냥이 한 마리는
이제 나에 대한 경계심도 많이 없어져
2~3미터 앞까지는 접근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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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들이 먹이를 먹을 때마다 어미고양이는 먹이를 양보한 채 아예 축사 바깥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곤 한다.

특히 새끼 삼색이 한 마리는 내가 올 시간이 되면 축사 밖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곤 한다.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멀리서 이야옹거리며 반기기까지 한다.
이제 겨울이 코앞이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점은 축사 입구에 볏단이 잔뜩 쌓여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축사냥 가족이 얼어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 때마침 <길고양이 보고서> 구독자 한분이 사료 2포대를 보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축사냥들에게 듬뿍 퍼다 나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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