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밥 주지 말라며 할머니가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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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밥 주지 말라는 할머니의 은근한 협박

 

 

자연 속에서 마음 편히 살아보자고 2년 3개월 전 시골로 이사를 왔다. 환경은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맹꽁이가 울고, 종종 개울물을 마시는 고라니를 만나기도 했다. 시골이니까 사람들은 순박하고 다들 땅을 닮아서 너그러울 줄로만 알았다. 고양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고양이에 관한한 시골 사람들의 인식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지난 2년 3개월 동안 캣대디로 살아본 시골살이의 경험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절망적’이다. 희망이 안보인다.

 

 우리집 마당 진달래꽃 아래서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어미 삼색이.

 

며칠 전 우리 동네 파란대문집에 살던 달타냥이 눈을 감았다. 달타냥의 집사인 할머니에게 이웃들이 닦달하듯 고양이가 텃밭을 파헤치니 묶어놓으라고 을러대는 바람에 임시로 집에 있는 줄로 고양이를 묶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고양이가 목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줄에 목이 졸려 숨이 끊기고 만 것이다. 그 말을 했던 이웃은 바로 내가 사는 집의 옆집과 옆에 옆집 할머니였다. 두 분은 달타냥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찾아와서 하는 말. “집에서 고양이 밥 주고 있지? 저번에 보니까 그릇에 사료가 있던데. 밥 주지 마!” 이웃집 몰래 준다고 007 작전처럼 눈을 피해 사료를 줘 왔지만, 결국엔 이렇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지난 겨울부터 우리집을 찾기 시작한 턱시도 녀석은 우리집을 아예 영역화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텃밭에 상추씨 뿌려놨는데, 고양이가 여기저기 다 파헤쳐 놨어! 내가 이래 보니까 고양이가 그 집으로 막 들어가더라고. 고양이 꼬이게 밥을 왜 줘?” 난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다고 예, 앞으로 안 줄게요, 할 수도 없었다. 달타냥까지 죽은 마당에 나도 할말은 해야 할것 같았다. “그 전에 마을회관 앞 쓰레기봉투 다 뜯겨 있고 그랬죠? 근데 지금 쓰레기봉투 뜯긴 거 봤어요? 제가 밥을 주니까 고양이가 쓰레기봉투 안뜯잖아요. 그리고 밥을 안주면 고양이는 어차피 우리집 개사료나 다른 집들 개사료 다 뜯어서 훔쳐먹을 거예요. 근데 밥을 주니까 안그러잖아요.”

 

 저물녘 논에 묵은 볏짚을 태우는 광경을 구경하는 턱시도(위). 밥을 먹고 테라스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턱시도(아래).

 

그러자 또 다른 할머니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요즘은 고양이가 쥐도 못잡는데, 밥은 왜 주는지 몰라!” 이 말도 나올 줄 알았다. “고양이가 쥐를 왜 못잡아요. 얼마 전에 여기 오는 고양이가 쥐 두 마리를 잡아다 테라스에 올려놨는데요.” 사실 이건 두어 달 전쯤 이틀 간격으로 쥐와 새를 각각 한 마리씩 선물로 가져다놓은 사실을 ‘얼마 전’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새 한 마리를 쥐로 바꿔치기하긴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할머니는 못믿겠다는 눈치였다.

 

 이 녀석 이제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우리집 현관 앞에서 식빵도 굽는다.

 

“글구 애 키우는 집에서 고양이는 왜 또 집안에 키워요. 털이 얼마나 날린다구. 뭔 영화를 보겠다구 고양이를 키워요. 알만한 사람이.” 이 대목에서 나는 할말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도 텃밭을 가꾸고 있지만, 그래서 가끔은 고양이가 파헤쳐놓은 것을 다시 덮어놓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양이를 묶어놓거나 밥을 끊어야 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고양이가 여러번 파헤쳐 놓았어도 작년에 우리집은 상추가 남아서 결국엔 밭에서 웃자라 버렸다. 고추도 남아돌았다. 설령 소출이 줄어서 몇 포기 손해봤다고 치자. 그게 고양이를 죽일 만큼 엄청난 일인가? 어쩌다 시골의 정과 인심이 이렇게 각박해 졌을까?

 

 턱시도 녀석은 밥을 먹고 난 뒤, 마당에서 놀다가 옆집 할머니가 텃밭에라도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을 친다.

 

옛날 농부들이 콩 세 알을 심는 뜻을 이들은 왜 모르는 걸까? 한 알은 벌레에게 주고, 한 알은 새에게 주고, 나머지 한 알은 사람이 먹고. 세 알 중에 두 알은 자연에게 동물에게 베푸는 게 농부의 마음이 아니었던가. 한겨울 먹을 게 없는 까치를 위해 홍시 몇 알을 남겨두는 까치밥의 인심도 이제는 기대하면 안되는 걸까. 내 아기가 소중한 만큼 나는 고양이도 소중하다. 나는 내 아기에게 사람을 위해 동물을 아무렇게나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무슨 영화를 바라고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함께 사는 행복. 같이 있으면 좋은 것. 그저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것. 그렇다. 고양이로 영화를 볼 수는 없을 지라도 위로는 된다. 뭐 이 대목에서 “고양이로 진짜 영화도 만들었어요.” (영화 <고양이춤>은 최근 국제적인 환경영화제인 서울환경영화제에서도 경쟁작에 진출했다)라고 농담을 건네고도 싶었지만, 분위기가 험악해서 그만두었다.

 

 밥 먹으러 온 삼색이와 턱시도 가족(위). 게걸 조로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턱시도(아래).

 

내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자 두 할머니는 서로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마을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얼핏 들리는 단어 하나. ‘쥐약’ 어쩌고 저쩌고 그런다. 예감이 안좋았다. 시골 사람들은 왜 텃밭이 파헤쳐지면 고양이부터 잡아 없애려고 하는 건지. 언제부턴가 시골에서는 쥐약이 고양이를 잡는 약이 되어 버렸다. 이유없이(텃밭을 파헤치는 게 고양이들 죽여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고양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면 분명히 동물보호법(제7조 도구·약물을 사용하여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는 행위) 위반으로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어 있지만, 시골에서는 이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쥐약을 놓아서 고양이를 죽였다고 신고해도 일선 경찰서에서조차 당연한 것으로 도리어 신고한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고발한다고 해도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놓았는데, 고양이가 죽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자리가 비워지지 않자 이 녀석 대담하게 게걸 조로에게 다가서고 있다.

 

사실 시골에 살면서 쥐약 놓는다고 옆집 할머니를 신고할 수도 없다. 그랬다면 곧바로 그 동네에서 그 사람은 지탄의 대상이 될뿐더러 온전하게 동네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도 없게 된다. 이건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이 웬수다. 고양이가 텃밭을 파헤쳐 피해를 주는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쥐약을 놓아서 고양이를 죽이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보다 더 못사는 나라에서도 그렇게는 안한다. 일본 고양이도, 라오스 고양이도, 미얀마 고양이도, 그리스 고양이도 텃밭을 파헤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 고양이만 죽어야 하는 거냐고.

 

 게걸스럽게 밥을 먹은 조로가 이웃집 동정을 살피고 있다.

 

두 할머니가 “고양이 밥 주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간 지 3일이 지난 오늘 아침의 일이다. 마당에 나가보니 테라스 계단 아래 죽은 쥐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머리 쪽에 이빨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집에 오는 고양이 중 한 마리가 갖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옆집 할머니가 텃밭에 토마토 모종을 심고 계셨다. 나는 일부러 커다랗게 헛기침을 하면서 삽으로 죽은 쥐를 떠서는 할머니가 보란 듯이 그 앞으로 지나갔다. 할머니가 흘끔 쳐다보기에 나는 “고양이가 어젯밤 쥐를 물어다 놨네요.”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쥐를 버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고양이 약 놓을라 했는데, 일단 놔둬야 겠네... 저기 거름더미에 쥐가 이만한 게 왔다갔다 하던데... 그 놈이나 좀 잡지...” 하면서 다독다독 모종에 흙을 돋우었다.

 

 "인석아 이제 옆집 눈에 안띄게 낮에 오지 말고 밤에만 오거라...."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또다시 고양이가 텃밭을 파헤쳐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리면 욱, 하는 심정으로 쥐약을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이웃마을에도 쥐약 놓는 아주머니 때문에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봄이 완연한데도 그 얼음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녁이 되어서 삼색이 어미와 턱시도 새끼가 밥 먹으러 왔기에 나는 사료를 내주며 녀석들에게 한마디 했다. “너희가 살려면 부지런히 쥐를 잡아와야 해. 알았지?” 이 말만큼은 녀석들이 알아들어야 하는데... 아랑곳없이 턱시도와 삼색이는 아작아작 달빛 아래서 사료를 씹어먹었다.

 

 "가끔씩 쥐도 잡아와야 한다. 그게 너희가 사는 길이란다."

 

달타냥이 고양이별로 떠난 뒤, 우리집에는 이제 턱시도와 삼색이, ‘게걸 조로’라 이름붙인 성묘 턱시도, 깜찍이가 낳은 고등어 한 마리. 이렇게 네 마리만이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있다. 특히 삼색이와 턱시도 모자(모년가?)는 하루에도 두세번 씩 우리집을 찾는 단골이 되었다. 심지어 턱시도 녀석은 오래 전 바람이가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고 나면 테라스 아래에서 한참을 쉬었다 가기도 하고 마당을 기웃기웃 돌아다니다가 현관 앞에 올라가 식빵을 굽기도 한다. 가끔은 ‘게걸 조로’가 사료를 먹고 있는 동안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얼른 나오라고 시위도 한다. 어느덧 우리집 마당에는 활짝 피었던 진달래도 지고, 복사꽃과 철쭉이 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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