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약 놓는 이웃집, 죽어나가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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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고양이

 

 

지루한 장마와 폭우가 끝나자마자 여름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최근 들어 너굴이와 몽당이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더니 이제는 둘이 볼을 부비고 뽀뽀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너굴이는 그렇게 못살게 굴던 몽당이네 아기고양이들에게도 꽤나 살갑게 굴었다. 친하게 지내라는 내 주문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수컷과 암컷간의 흔한 ‘로맨스’라도 있었던 걸까. 몽당이와 너굴이는 종종 테라스 난간에 올라가 서로 마주보며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연인 사이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다정한 포즈가 나올 리 없었다.

 

마당의 먹이그릇 앞에 앉아 있던 몽당이(위)와 몽당이네 아기고양이 두 마리(아래).

 

몽당이네 아기고양이 두 마리의 경계심도 약간 누그러졌다. 이제는 가끔 낮에도 찾아와 밥을 먹고 한참을 머물다 간다. 한밤중에 테라스에 올라와 방충망을 타고 오르는 스파이더묘 흉내내기도 여전하다. 한번은 장난으로 거실창에 손바닥을 대고 장난을 쳤더니 노랑점박이 녀석이 내 손에 제 발을 갖다 대는 거였다. 어쩌나 보려고 내가 손바닥을 옮길 때마다 이 녀석 따라다니며 바깥에서 내 손바닥에 발바닥을 맞춰보는 것이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나는 캔과 간식을 테라스에 내놓았다. 이전에도 몇 번 캔을 내놓은 적이 있지만, 멸치나 소시지 따위는 준 적이 없었다. 어미 몽당이는 소시지를 내놓자마자 한 덩이를 물고 새끼들이 기다리는 테라스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서너 번 녀석은 새끼들에게 먹이 배달을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몽당이는 툭하면 거실 방충망 앞에 앉아서 거실 안에 대고 야옹거렸다. 그릇에 사료가 수북한데도 야옹거리는 걸 보면 간식을 내놓으라는 것이 분명했다.

 

테라스에 올라온 몽당이와 노랑점박이.

 

수시로 간식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몽당이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내가 거실문을 열고 나가면 먼 곳에 있다가도 부리나케 달려와 내 주위를 맴돌았다. 툭하면 집고양이를 위한 캣닢 화분에 올라가 꽃잎을 따먹더니, 이제는 아예 거기 웅크려 앉아 낮잠을 자곤 했다. 뿐만 아니라 테라스 난간에 세워놓은 솟대를 붙잡고 한참이나 발톱을 갈았다. 얼마 전에도 몽당이는 캣닢 화분에 올라가 있었는데, 저물어가는 하늘과 솟대와 화분에 올라앉은 녀석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녁 하늘과 솟대와 고양이의 실루엣. 그것이 몽당이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매일 아침 테라스에서 밥을 기다리던 녀석이 보이지 않아 내가 이상하다고 하자 아내는 “새끼 낳으러 간 거 아닐까?” 그러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녀석은 배가 꽤 불룩해져서 출산이 머지않아 보이긴 했다. 점심 때가 되도록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졸음에 겨워 칭얼거리는 아들 녀석을 겨우 재워놓고 대문을 나서는데, 오른쪽 아래편에 고양이가 누워 있었다. 몽당이였다. 이 녀석 왜 저기서 자고 있나, 하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녀석은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고, 코에서도 진물 같은 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앉아서 녀석의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녀석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덜미는 싸늘했다.

 

먹이원정 오는 길에 꽃다지 방죽에 앉아 있던 몽당이네 가족(위). 몽당이와 너굴이는 최근에 급격히 사이가 좋아졌었다(아래).

 

외상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살아서는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몽당이를 죽어서야 이렇게 만지게 되었구나. 이제야 겨우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친분을 좀더 나누지도 못하고 너는 서둘러 가버렸구나. 나는 싸늘하게 굳은 몽당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잘 가라 고양이야! 잘 가라 뱃속의 아가들아! 고양이별에 가거든 여기서 못다한 생을 오래오래 누리거라.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하니,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렇지만 나는 자꾸만 사람들이 미워지는구나. 여기는 고양이별이 아니니까, 조금은 미워해도 괜찮겠지. 산 아래 구덩이를 파고 몽당이와 뱃속의 아가들을 묻어주는데, 갑자기 분노 같은 마음의 화가 치밀었다. 사실 열흘 전쯤인가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옆집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구 이놈의 고양이 새끼들 여기 또 이렇게 파재껴 놨네. 이 놈 새끼들 안되겠구만!” 하필이면 요즘이 김장용 무 배추 모종을 심거나 파종한 무 배추 씨가 올라오는 중이라 이웃집 사람들은 잔뜩 예민한 상태이다. 아마도 이웃집에서 텃밭 인근에 쥐약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죽은 몽당이가 거품을 잔뜩 물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무렵에 산책을 나가다 보니 길과 텃밭 사이에 접시 한 그릇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생선 같은 것을 놓아두었다. 이미 생선은 쥐약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쥐약 때문에 뱃속의 아기와 함께 고양이별로 떠난 몽당이.

 

당장에 달려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고양이 따위 배추 한 포기만도 못할뿐더러 쥐만큼도 생각 안한다.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게 분명하다. 나는 한밤중에 몰래 나와 쥐약 그릇을 비워버렸다. 도대체 몇 마리를 더 잡을 속셈인지. 이튿날 아침 마당에 나왔다가 나는 또 마음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삽으로 무언가를 떠서 개울가에 버리고 오는 거였다. 얼핏 이런 얘기도 들려왔다. “허연한 게 이쁘게 생겼드라구.” 그날 이후 몽당이를 따라 먹이원정을 오던 두 마리의 아기고양이, 노랑점박이와 고등어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쥐약을 먹었던 게 틀림없다.

 

몽당이가 떠나기 전날 캣닙 화분에 올라앉아 있던 몽당이.

 

이후에도 쥐약은 매일같이 그곳에 놓여졌다. 벌써 일주일도 넘었다. 일주일 넘게 나는 밤중에 몰래 나가 쥐약을 치우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 사실 이웃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고양이에 관한 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음식 따위 입에도 못 대도록 맛있는 간식과 캔과 사료를 잔뜩 내놓을 걸. 임신묘라는 걸 감안해 더 많은 사료를 담아둘 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고, 소용없는 일이다. 몽당이와 아기고양이 두 마리는 그렇게 고양이별로 떠났다. 고통스러운 몸으로 녀석들은 우리를 원망했을 것이다.

 

화분에 앉아 있던 몽당이와 솟대와 하늘.

 

잘 가라 고양이야! 잘 가라 뱃속의 아가들아! 좀더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해 내가 미안하구나! 가거든 내 마음 속 고양이들에게 안부라도 전해다오! 달타냥과 바람이, 봉달이와 까뮈, 여울이와 여리,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인간을 원망하며 떠난 모든 고양이들에게 이 말을 전해다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양이를 미워하는 건 아니란다. 수많은 작은 사람들이 수많은 작은 손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작은 일들을 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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