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 박지성, 노란옷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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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옷가을: 헤이리 100배 즐기기



어느새 바람이 차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배미마다 기러기떼가 까맣게 내려앉아 떨어진 낱곡을 쪼아먹고 있다. 길가에는 들국이며 벌개미취가 벌써 끝물이다. 헤이리 입구의 단풍나무며 은행나무는 이제 붉고 노란 잎들을 떨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이리의 가을은 결코 스산하거나 외롭지 않다. 산책로에는 막바지 가을을 거니는 연인들이 보이고,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은 노란 병아리옷을 입고 가을 햇볕 속에서 시끄럽도록 종알거린다. 서점과 카페, 갤러리와 이색 박물관마다 사람들의 발길도 넉넉하다.

파주에는 파주출판도시와 영어마을과 같은 테마형으로 설계된 마을이 유난히 많다. 헤이리 예술마을도 그중 한 곳이다. 헤이리는 제각각 개성적인 예술 공간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구경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비교적 예술마을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북하우스(Book House)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무난하다. ‘북하우스’는 서점과 갤러리, 레스토랑과 카페가 한 건물에 어울린 복합 예술문화공간이다.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북하우스에 들어서면 출입문 오른쪽 지하에 갤러리가 자리해 있고, 정면에는 레스토랑이, 레스토랑을 우회하면 독특한 구조의 서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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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어린이 테마파크 <딸기가좋아>에서 만난 노란옷의 아이들.

이곳의 서점은 지그재그식으로 3층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옥상 카페로 올라가는 길을 계단이 아닌 완만한 경사의 복도로 꾸며 오른쪽에 책꽂이를 두고, 누구나 복도에서 책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진열된 책은 아래쪽에서 위쪽까지 예술, 문학, 인문, 생태, 여행, 아동, 사진 등 테마별로 정리해 놓았는데, 복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따로 열람하기 좋게 책을 수평 진열대에 정리해 놓았다. 이렇게 서점을 도심 한복판이 아닌 도심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외곽의 자연속에 만들어놓은 것은 이 첨단 디지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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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옷의 아이들 너머로 노란 가을이 지고 있다.

그것은 서점을 도심에서 멀리 옮겨놓음으로써 책을 읽는 아날로그 행위를 좀더 자연 가까이 옮겨놓은 것이다. 북하우스가 서점을 중심으로 한 복합문화공간이라면, ‘반디’는 북카페로 알려져 있다. 북하우스에서는 구입한 책이 아니면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을 수 없지만, 북카페 반디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카페에 비치된 책을 접할 수가 있다. ‘매거진 하우스’는 1500여 종의 잡지를 장르별, 종류별로 나눠 전시, 판매하는 잡지박물관이자 잡지전문서점이다. 국내에서 발행하는 잡지뿐 아니라 해외에서 발간한 다양한 종류의 잡지를 만날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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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에서 만난 박지성 광고판.

그런가 하면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만을 따로 모아놓은 ‘동화나라’도 있으며, 어린이 테마파크인 ‘딸기가 좋아’에는 ‘집에 안갈래’라는 어린이책을 테마로 한 문화체험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딸기가 좋아’는 헤이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평일에는 인근의 유치원에서 즐겨 나들이를 오는 곳이고, 주말이면 아이들을 앞세운 가족여행 코스로 인기가 높다. 쌈지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딸기가 좋아, 바다가 좋아, 집에 안갈래 등 다양한 테마파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딸기가좋아, 바다가 좋아 테마파크에는 볼풀장을 비롯한 실내 어린이 놀이터와 체험 교육장이 마련돼 있고, 가족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가족식당과 카페도 운영한다. 실내 놀이터에는 따로 선생님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 가족들은 잠시 아이들을 맡기고 헤이리 나들이도 할 수가 있다. 최근에 생겨난 ‘씽크씽크 미술관’은 어린이 예비작가를 위한 테마공간 노릇을 하며, ‘아트 팩토리’ 또한 어린이를 위한 아트 커뮤니티 공간이다. 주로 미술과 어린이를 테마로 한 다양한 예술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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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에서 가장 유명한 북하우스. 가을과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헤이리에 온 이상 헤이리의 존재성을 입증하는 갤러리와 이색 박물관을 그냥 지나치는 건 헤이리의 참모습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헤이리의 갤러리와 박물관은 건축물의 외관만큼이나 그 개성과 특성도 제각각이다. 헤이리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한향림갤러리’는 도자기와 항아리 전문 갤러리로 유명하고, 한국적인 도예작품과 세계적인 도예작품을 주로 전시한다.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일명 장독대 카페에 올라 헤이리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또다른 즐거움이다. ‘식물감각’은 식물을 테마로 한 작품을 전시하는 독특한 공간이며, ‘스페이스 이비뎀’은 유리 전시장과 갤러리, 야외 공간이 조화롭게 어울린 개성적인 오픈 갤러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93MUSEUM’은 헤이리에서 가장 큰 전시공간이자 국내 최초의 인물미술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단군에서부터 현대의 전·현직 대통령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전시돼 있는데, 특히 조선시대 인물전시관과 명·청시대 인물전시관은 한번쯤 둘러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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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로 살짝 전시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이밖에도 크로스오버 공연을 주로 하는 소극장 ‘이구동성’과 헤이리를 찾은 예술가와 여행자의 게스트하우스인 ‘모티브-원’, 이국적인 악기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 ‘세계민속악기박물관’, 방송인 황인용 씨가 운영하는 음악감상실 ‘카메라타’, 영화박물관 ‘씨네팰리스’, 먹을거리로서의 초콜릿과 작품으로서의 초콜릿을 함께 전시·판매하는 ‘초콜릿박물관’도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공간들이다. 헤이리에 존재하는 수많은 건물과 갤러리, 박물관 등은 굳이 전시장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작품이고 예술이다. 예술적으로 설계되고 디자인된 건축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헤이리를 찾은 보상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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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 푸른 하늘.

익히 알려져 있듯 서울 근교 파주에 자리한 헤이리는 예술마을이다. 예술을 생산해내고, 예술을 생산하는 예술가들이 살며, 예술가들이 만든 예술품을 전시하거나 판매할 뿐만 아니라 거주공간과 상업공간마저 예술적으로 들어선 곳이 바로 예술마을 헤이리다. 한마디로 헤이리는 건축과 미술, 음악과 공연예술, 사진과 영상, 문학과 출판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가 복합적으로 생산되고, 소통하며, 거래되는 통로이자 무대인 셈이다. 이런 통로와 무대는 자연스럽게 전시장과 서점, 카페, 레스토랑과 같은 상업적인 공간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더욱이 헤이리에 들어선 주거지와 전시공간은 자연과 어울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 생태마을을 지향하고 있다. 이곳의 공간들은 설계 때부터 주변의 자연환경을 헤치지 않도록 계획되었으며, 건물의 층수를 3층 이하로 제한함으로써 주변의 산자락과 자연의 스카이라인을 침범하지 않도록 했다. 또한 주거지 인근의 늪을 생태적으로 보존하는 한편, 헤이리를 관통하는 하천도 자연하천을 유지하도록 보완하였다. 마을의 공터와 녹지에 우리 꽃과 나무로 조경한 것과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것도 생태적인 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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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란 이름은 파주 지역에 전해오는 전래농요 ‘헤이리 소리’에서 빌려왔다. 지난 1994년 처음 구상된 헤이리 예술마을은 1997년 건축가, 미술가, 작가, 음악가, 영화인 등 37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해 총 15만평 부지에 각기 독특한 집과 작업실, 갤러리 등을 짓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헤이리에 들어설 문화예술공간은 아직도 건설중인 것이 많아 사실상 헤이리는 완성된 마을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아트밸리라 할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선 모든 공간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요, 학생들에게는 문화예술학교이며, 일반인에게는 예술체험공간이자 예술가들에게는 작품이 대중과 1:1로 대면하는 열린 문화통로이다. 이제껏 유례가 없는 한국적인 예술공간, 자연으로 들어간 아트밸리가 바로 헤이리인 것이다.

*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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