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늙은 이 한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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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그리운 이 한 장의 사진


주황으로 물든 감나무 불길 속을 천천히 헤쳐 돌고개에 당도한다. 외롭고 고요한 산중마을. 그러나 돌고개에 이르러 나는 요란한 손님 접대를 치러야만 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개 한 마리가 나를 보며 크엉컹컹 짖어댄 것이 이내 온 동네 개들을 깨워 산중이 떠나갈 듯한 개소리로 돌변한 것이다. 갑자기 나는 도둑이라도 된 듯 제 발이 저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밥 먹던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죄 문을 열고 누가 왔나, 살피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는 것이다. 조용하게 마을을 돌아보고 우아하게 떠나고 싶었던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히 도둑치고는 내가 너무 어리숙하게 생겼던지 마을 사람들은 금새 안심하는 눈치였다.

눈치 볼것없이 나는 벌써 따뜻한 아궁이가 그리워 무작정 굴뚝에 연기 나는 집을 찾아 들어섰다. 때마침 아침밥을 다 먹었는지 노부부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서 계시고, 할머니는 봉당에 어색하게 서서 나를 본다. 봉당 구석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경계의 눈빛을 하고 앉아 있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이 풍경!  외롭고 쓸쓸한, 그러나 오래오래 그리웠던 고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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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개 김길상 할아버지댁의 늦가을. 할아버지는 마루에서 할머니는 봉당에서 고양이는 부엌 앞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나그네와 마주쳤다. 

“미물(메밀) 비러 갈려구유. 잘 되두 안 했어유. 아이구 저 논에두 멧돼지가 막 내리와서 움막 지놓고 두달을 망을 봤다구유. 낮에는 일하구, 저녁에 누자면서. 베를 다 씹어먹구, 깨밭두 막 둘쑤시놓구 그래 얼마 전에 한번은 홀무 놓구 잡았었드마 누가 끌러가 부렀어. 다 홀낀 거를 누가 쨉어간 모냥이여. 멧돼지 내리온다구 민에다 얘기해두 소용없어유. 민 사람이 멫맹이나 된다구.” 김길상 할아버지가 마루에 서서 낯선 사람에게 공연히 푸념을 늘어놓았다.

곶감철인데도 마을에는 아직 나무에 감이 그대로다. 농사가 바빠서 손을 못대고 있다는 것이다. “서리 내리면 물러서 못 쓰는데, 원체 바쁘니까유. 여기 감은 먹감이유. 우리야 곶감 여남은 접썩 쪼맨해유. 이 나이에 낭기 높으니 올라가든 못하구 저래 있는 감두 인제 다 빠질 판이유.” 곶감도 늙어지면 하기가 힘든 일이다. 그러고보니 마을에 곶감이 내걸린 집이 몇 집 없다. 슬프게도 젊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증거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젊은 나그네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끝내 서둘러 마을을 떠난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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