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미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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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미식가

                                                                                              이용한


 

다시 난 길 떠날 것이다

여긴 비릿하지도 않고 덜컹거리지도 않으며 갸륵하지도 않다

난데없는 풍랑으로 며칠씩 섬에 발이 묶이고,

눈길에 미끄러진 애마를 시골 카센터에서 ‘야매'로 고치면서

다시 난 편서풍에 몸 맡길 것이다

아무래도 난 한계령 사스레나무가 알량한 연애보다 좋고

왕피천 노을이 충무로 극장보다 좋다

새벽 6시의 바닷바람에 난 미칠 것이고,

어느 날 송계 동문 쯤에서 주저앉을 것이다

애당초 좋은 시인 되기는 글렀으니,

내게는 시 한 줄보다 바람 한 줄기가 감개하고,

서랍 속의 장자보다 속 다 내놓은 산중 빈집이 무량하다

그리하여 난 주머니 속의 시간을 길에다 버릴 것이다

관계의 틈에서 내쳐질 것이며,

이 얽히고 설킨 연애의 덤불에서 벗어날 것이다

다시 난 31번 국도로 갈 것이고,

목포에서 배 탈 것이다

길이 다한 여인숙에서 구름 뜬 술이나 한 잔 하면서

꽃 지는 창 밖을 볼 것이다

때때로 수첩을 꺼내 도마령을 비추는 하현을 기록할 것이다

이 집도 절도 없는 정거장에서

다시 난 쓰디 쓴 사랑을 할 것이다.

                                    -- 시집 <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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