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았는가, 성인봉 원시림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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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는가, 성인봉 원시림 단풍

“섬에는 조수의 간만을 비롯하여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 전통적인 생활의 속도가 존재한다” - 쓰지 신이치, <슬로 라이프> 중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동안 숱하게 단풍 구경을 했지만,
이렇게 황홀한 단풍은 처음이다.

울릉도에서, 그것도 성인봉에 올라 바라보는 원시림 단풍은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감탄만 연신 새어나올 뿐이다.
뭍보다 한발 늦게 가을이 오는 울릉도에서는
해마다 11월이면 이런 황홀경이 지천으로 펼쳐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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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원시림 지대의 황홀한 단풍숲 풍경.

울릉도의 진정한 비경을 보고자 한다면, 나리분지와 알봉분지를 놓쳐서는 안된다. 나리분지와 알봉분지는 성인봉(984미터)과 주변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빙 둘러싼, 움푹한 곳에 자리해 있다. 이 곳에는 조선시대 개척민 1세대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투막집도 여러 채 남아 있다. 투막집은 뭍에서의 귀틀집처럼 통나무 귀를 맞춰 쌓은 집을 말하는데, 본체 주위에는 억새나 옥수숫대를 엮어 만든 ‘우데기’를 빙 둘러친다. 울릉도의 투막집은 나무를 쪼개 만든 너와지붕이 한 채, 억새를 떠다 엮은 억새지붕이 네 채다. 지금은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전시용 투막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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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정상에서 바라본 알봉분지와 나리분지, 북쪽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

10년 전에 비해 나리는 많은 것이 변했다. 꽤 많은 집들이 나리를 떠났고, 남은 집들은 대부분 호구지책으로 식당이나 민박집 간판을 내걸었다. 나는 승합차를 함께 타고 왔던 관광객들이 건네는 막걸리 한 잔과 파전 한 조각을 얻어먹고, 혼자서 성인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전 10시였고, 알봉분지를 거쳐 성인봉을 넘어가 나는 도동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나리에서 알봉분지로 이어진 길은 숲을 음미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길이다. 숲에서는 내내 나무를 두드리는 딱따구리 소리가 났다. 심지어 20여 미터 앞에서도 딱따구리는 고목을 쪼아대고 있었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울도큰오색딱따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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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된 성인봉 원시림지대의 멋진 원시림 단풍.

알봉분지에 거의 이르렀을 때, 말로만 듣던 ‘울릉국화/섬백리향 군락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11월이어서 꽃이 남아 있을까 염려했지만, 군락지에는 절정에 다다른 희고 뽀얀 울릉국화와 지기 직전의 연자주 섬백리향이 마지막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섬백리향은 그 향기가 백 리까지 간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 뱃사람들은 이 섬백리향 향기로 뱃길을 잡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떻게 울릉국화와 섬백리향이 같은 장소를 서식처로 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워낙에 귀한 꽃이라 이 곳의 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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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에서 만난 너와지붕을 한 투막집의 가을.

알봉분지에서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은 신령수 지점까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신령수를 지나면서부터는 가파른 경사가 6~7부 능선까지 계속된다. 가파른 경사가 한풀 꺾이는 지점부터는 이제 정상부까지 성인봉 원시림지대(천연기념물 제189호)가 내내 이어진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아무렇게나 뻗어올라간 가지와 그 가지를 휘감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치렁치렁 뻗어나간 넝쿨이 얽히고 설킨 천연한 원시의 숲! 해가 들지 않을 정도로 컴컴한 활엽수 그늘에는 비밀의 화원처럼 이끼의 숲과 고사리숲, 털머위밭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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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봉분지에서 만난 11월의 투막집.

때마침 단풍은 절정에 이르러 원시림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빛깔의 잎들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그동안 숱한 단풍을 보아 왔지만, 이토록 아찔한 단풍은 처음이다. 사실 원시림지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나는 태어나서 가장 힘든 등산을 해야 했다. 경사가 험한 탓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나리에서 겨우 파전 한 조각과 막걸리 한잔을 먹은 게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게다가 나는 10킬로그램이 더 되는 카메라 가방까지 매고 있었다. 설상가상 가방 외피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물통은 어디로 빠졌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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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가는 길에 만난, 천연기념물 울릉국화 군락지.

원시림 인근 샘물에서 나는 물로 배를 채웠지만, 물을 담아갈 통이 없었다. 통이라고는 네 개의 빈 필름통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물 한 모금 들어가는 필름통마다 물을 채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심했다. 순간을 음미하라. 극한 상황에서는 이 말이 사치스럽게 들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아찔한 원시림 단풍과 성인봉에서 알봉분지까지 스펙트럼처럼 펼쳐진 단풍의 물결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서 나는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는 성인봉 정상에서 한 20분쯤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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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동항의 가을 풍경.

다행히 성인봉에서 도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보다 훨씬 순했다. 성인봉을 오를 때 사람들이 왜 도동 쪽에서 오르는지 알겠다. 이래저래 성인봉에서 내려와 도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공복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7시간의 산행을 한 셈이다. 내려오자마자 나는 식당으로 들어가 무슨 약초 해장국인가를 시켜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와 씻지도 않은 채 그냥 곯아떨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오전에 출발하지 못했던 독도행 유람선은 날씨가 좋아진 오후에 출발해 무사히 접안에 성공했다고 한다. 나는 덤덤하게 이 소식을 전해들었다. 해발 984미터에 불과한 성인봉이 나에게는 무슨 극지처럼 느껴져 그곳을 다녀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혼자 마음을 다독였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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