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전 세계 저편의 목가적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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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전 세계 저편의 목가적 꿈
-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효형출판)


"우리들 중 하나가 분필을 들고 있다가, 지나가는 1학년 학생의 등에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썼다.(중략) 우리는 그 아이가 등에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씌어진 옷을 입고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건 보기에도 좋았고, 자연스러웠으며, 1학년 학생이 등에 분필로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문구를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보기에 즐거웠다." 계속해서 소설 속의 '나'는 1학년 아이들의 등에다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써서 보낸다. 결국 교장 선생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흠 '미국의 송어낚시'라." 교장은 장난친 아이들을 교장실로 불렀다. "만일 내가 선생님들을 전부 여기 모이게 한 다음 등에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쓴다면 우습지 않겠니?" 하지만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여기서 말하는 1학년은 순진한 인간 군상 즉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순진한 처녀이거나 순수한 유년을 빗댄 것이다. 그리고 6학년은 어느 정도 때묻고 굴러먹은 근대성이자 향수적 인간에 다름아니다. 그는 저학년을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목가적 꿈과 순수한 동심과 자연주의의 이념을 물려주려 한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바로 그것의 상징이다. 그러나 제도권과 때묻은 군상을 상징하는 교장 나리는 그것을 불온한 선동으로 몰아붙인다. 순수하고 진보적인 이상은 때묻은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는 곱고 마땅할 리가 없는 것이다.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는 바로 이런 순수하고 목가적인 꿈에 대한 단편들이다. 소설에 실린 무수한 삽화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지만, 포스트모던한 자연주의 이념으로 줄줄이 연결되고 있다. 이들 이야기들은 전혀 소설적이지 않고, 서사적이지 않다. 이야기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 가령 '호두 케첩을 만드는 또다른 방법'처럼 요리 안내서처럼 기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삽화의 말미에도 전체를 연결하는 고리는 송어낚시다. 즉 "미국의 송어낚시와 마리아 칼라스(미식가)는 자신들의 햄버거에 호두 케첩을 부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브라우티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다, 미국의 송어낚시다. 미국의 송어낚시라고? 그게 뭐지? 미국은 당시에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오로지 돈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아스콘처럼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설을 통해 그 속도전의 세계 저편에 있는 목장과 호수와 초원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빠르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는 강에서 호젓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송어낚시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속도전의 세계 저편에 분명 그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단지 그는 그런 목가적 꿈을, 어찌 보면 실현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하매, 현대인의 파편화된 이성에 맞서 파편화한 삽화로 맞섰다. 쿨 에이드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월든 호수. 미국의 송어낚시 테러리스트. 미국의 송어낚시와 FBI.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를 넬슨 엘그린에게 보내기"에 대한 각주 장. 호텔 '미국의 송어낚시' 208호. 이런 소제목들 또한 그런 이성의 파편들이다. 하지만 그 이성은 너무나 감성적이며, 원시적이다. 본디 소설이란 굳이 이야기일 필요가 없으며, 이야기가 굳이 논리적일 필요도 없다. 나는 이 소설에서 비로소 몇 마리의 송어를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 낚싯대는 다 부러졌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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