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풍류-길 위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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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이 시대의 풍류'] 길 위의 시인 이용한
가을, 높고 외로운 산마루 찾아 … 발길에 나를 맡겼다


내게 오라 한 적도 없는 길들이 눈앞에 펄럭인다. 꽃피는 숲길이 발목을 잡아끌기도 한다. 봄에는 남도의 향긋한 바람이 나를 부른다. 가을이면 외롭고 높은 산마루가 그리웠다. 그럴 땐 길에 나를 맡겼다. 그 길 떠남과 돌아옴의 윤회는 필경 그리움과 기다림의 몸바꿈이 아닐까.

지난 10여년간을 그렇게 떠돌았던 나, 이용한(40)을 사람들은 길 위의 시인이라 치장했다. 스치는 바람결에도 나는 바람난 남자가 됐다. 슬그머니 두메산골이며 바닷가에 스며들었다. 숨어살기에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애인을 그곳에서 포옹했다. 길 위에서 나는 나무와 바람을 보았고, 구름과 언덕과 달빛에 눈시울을 붉혔다. 가슴으로 다가가 감응하려 했다. 때로는 다리가 아팠고, 어느 땐 마음이 아팠다. 10년간의 풍찬노숙에 나는 곤하고 더러는 망가졌다. 그것은 떠도는 자가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지불금이었다. 어딘가에 내가 만나지 못한 행복한 풍경이 존재하는 한, 나는 또 그것을 만나기 위해 야금야금 길을 먹어치우는 ‘길의 미식가’가 됐다.

나의 떠남은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왔다. 충주댐 건설로 중학교 2학년 때 고향집을 가슴에 묻으면서 갈 수 없는 귀향의 머나먼 방랑이 시작됐다. 오지마을의 옛집기행 등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을 찾아나선 것은 수몰된 고향집을 찾아나선 무의식적인 몸짓이란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된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정처없이 떠도는 여행가가 됐다. 대학 땐 시를 쓴다는 사명감으로 교문과 거리에서 시대적인 부조리와 대치했고, 졸업 후에는 겨우 들어간 직장에서 노조활동으로 3개월 만에 잘렸다. 다시 들어간 잡지사 근무 시절 나는 시인으로 등단(실천문학 신인상 수상)하고, 시집도 출간했지만, 타고난 역마살과 방랑벽을 억누르지 못해 스스로 출근하지 않는 인생을 택했다. 그때부터 보편적인 삶에서 이탈을 했다. ‘길 위의 시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2년의 세월이 그랬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나서 헤매고, 떠돌고, 때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초승달을 받아 적다 보니, 방랑이란 것이 조금씩 내 안으로 들어와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더 외롭고 낯선 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여행에 관한 한 나는 이제껏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 했다. 알려진 곳보다 버려진 곳을 떠돌았고, 명승 절경보다는 언제나 외로운 풍경에 심취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 역마가 호구지책이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누군가는 말한다. 하지만 이제껏 방랑이 나를 먹여살리진 못했다. 이런저런 책을 내고, 짤막한 잡문을 써 번 돈은 고스란히 길에 뿌려졌다. 시 쓴다는 놈이 잡문이나 쓴다고 어지간히 욕도 먹었다.
삼척 무건리 오지마을 답사길에 나선 이용한씨. 그는 산골 여행에서 너와집 굴피집 등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글로 기록했다.

방랑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이 40이 되어서야 혼인이란 걸 했지만, 그것이 오랜 떠돎의 면책이 될 순 없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한 삶을 바라는 이들에겐 나의 모든 행적이 불편부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들어선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해도 너무 늦었고, 너무 많이 왔다. 나에게 인생과 여행과 길과 시는 뒤엉킨 한 몸이고 한 뿌리다. 그것은 내가 택한 운명이고 비극이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여행하는 시인이든, 시 쓰는 여행가든 아무래도 좋다. 좀더 나는 떠돌 것이고, 좀더 나는 미안할 것이다. 좀더 희박하고, 좀더 건조한 곳에서 좀더 나는 시달릴 것이다. 아직도 나는 궁극의 방랑에 도달하지 못했고, 여전히 역마살의 운명 앞에 기진해 있다. 기약할 수도 없고, 안도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길 위에 서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다. 저자와 독자로 만나 배필이 된 아내도 그것을 이해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짧지 않은가. 정처없는 시간의 유목민으로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나는 어느 겨울날 ‘길의 미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어 보았다. 다시 난 길 떠날 것이다/여긴 비릿하지도 않고 덜컹거리지도 않으며 갸륵하지도 않다/ 난데없는 풍랑으로 며칠씩 섬에 발이 묶이고, 눈길에 미끄러진 애마를 시골 카센터에서 ‘야매’로 고치면서/ 다시 난 편서풍에 몸 맡길 것이다/ 아무래도 난 한계령 사스레나무가 알량한 연애보다 좋고/ 왕피천 노을이 충무로 극장보다 좋다/새벽 6시의 바닷바람에 난 미칠 것이고, 어느 날 송계 동문쯤에서 주저앉을 것이다.

길은 언제나 세상의 은밀한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오랜 옛날부터 시인들이 길에 탐닉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늘 우리의 숨겨진 모험심과 메타포를 자극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방랑’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식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로드무비’가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뿐이다.

나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길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아니 길에서 쓰고자 했다. 그 길에서 나는 옥수수대궁을 스치는 바람을 받아 적었고, 벼랑에 걸린 초승달을 보았다. 하지만 훌쩍 떠난다고 해서 여행이 모든 것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때때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몸만 고되고, 정신이 아픈 것. 이 외롭고 낯선 세상에 던져졌다는 느낌. 그럼에도 삶은 가는 것이고, 가고자 한다면 세상은 가는 자의 몫이다. 누군가 “그 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직 나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아직 나는 가야만 하는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펴낸 여행에세이집 ‘은밀한 여행’(랜덤하우스)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석탄가루가 날리는 도계의 저녁 여인숙에서, 팽목 항구에 나앉은 바닷가 민박집에서 나는 몇 번이나 나의 역마살을 탓했다. 도마령 길목의 상촌 굴다리 눈길에서, 폭설을 뚫고 기어이 올라간 윗면옥치 길 위에서 한번 더 나는 부딪히고 미끄러졌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 비릿하고 덜컹거리며 갸륵한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내년부터는 세계오지여행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이씨가 티베트 조캉사원 앞에 섰다.

여행이란 그저 길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과 구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숲에서, 바다에서,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은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있다. 굳이 수첩에 적지 않아도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 적는다. 마음이 받아 적은 것들은 언젠가 시가 되고, 산문이 되고, 행복한 기억이 된다. 설령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시인 프로스트는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새겨볼 만하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서 이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고 쓰고 있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머물고 있을 때는 늘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괴테는 유럽 전역을 떠돌았으며, 랭보는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을 통해 ‘문장의 힘’을 얻었고, 김시습은 젊은 시절 10여년 동안 방랑시인으로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현대시인 중에도 유난히 여행을 통해 시적 영감을 얻고, 여행을 주된 시의 테마로 끌어온 시인들이 적지 않다. 황동규의 ‘몰운대행’이나 조정권의 ‘산정묘지’, 최승호의 ‘고비’,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등이 단편적인 예에 속한다. 또한 김명인이나 기형도, 송재학, 신대철, 함성호, 박정대, 박용하, 임동확, 황학주 등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여행과 기행을 통해 수많은 시와 시집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동안 내가 해온 여행은 주로 두메를 헤매고 섬을 떠도는, 무수한 시간을 길에다 버려야 하는 여행이었다. 때로 차를 저만치 버려두고 하루종일 걸어야 했고, 느닷없이 들이닥친 태풍으로 선창가 민박집에서 며칠 동안 비오는 바다만 바라보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그게 다 추억이고 힘이다. 땅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몸짓과 표정을 감추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장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마련이다. 가령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얻었다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정선 같은 두메가 그렇다. 이마를 스치는 선연한 바람과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와 산천과 천연함이 뒤범벅된 순진한 시골. 사북 지나 고한에서 만난 폐광촌의 저녁은 아팠고, 정암사 계곡의 물소리는 오래오래 귓전에 부딪혔다. 오대천이며 임계천이며 소금강 물줄기를 다 모아 흐르던 조양강 물길은 나를 이리저리 이끌었다.

정선의 산굽이 강굽이마다 들어앉은 웅숭깊은 마을에서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에 나는 내내 눈이 매웠고, 순진한 추억에 젖었다. 하지만 정선에서의 날들은 조금씩 개발과 변화 앞에서 무너져갔다.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잊혀져갔다. 풍경의 무너짐 앞에서, 그러니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동원한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풍경의 감동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운데, 풍경의 무너짐을 이야기하기란 더더욱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진부하고 느린 추억의 껍데기 같은 기록을 위해 시간낭비에 불과한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시골의 천연함은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나오는 ‘문명의 쾌적함’에 늘 묻혀버린다. 언제나 도시의 논리에 시골의 가치는 묻혀가고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고샅길은 고속도로에게 멸망했고, 산자락을 에둘렀던 다랑논은 공장에게 패배했다. 커다란 나무는 베어졌으며, 나무에 깃든 신성성도 함께 잘려나갔다. 개발 앞에서는 모든 옛것이 진부한 것이었으며, 모든 자연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이런 현실이 지금껏 과거와 현재, 개발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일생을 “짤막한 섬광이지만, 충분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우리를 빚어낸 흙과 우리 영혼 사이에는 신비한 접촉과 이해가 존재한다고. 순진하게도 나는 아직 그 말을 믿고 있다. 이 땅에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내가 만나지 못한 행복한 풍경이 기다릴 것이라고. 그것은 내 삶의 시가 되고, 문장이 되고, 영혼이 될 것이라고. 이제껏 여행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전에 읽은 톰 브라운의 ‘자연에 미친 사람’에 나온 한 구절을 중얼거려본다. “신비는 빵 부스러기로 이어진 길처럼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자취의 주인을 향한 길을 야금야금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신비는 우리 속에, 내내 우리의 일부로 있다. 우리가 먹어치운 모든 신비의 자취들은 우리 자신의 자취 속으로 옮아들어간다. 인간은 자기 앞의 신비들을 먹으면서 세상을 사는 법이다.”

몇년 전부터 나는 해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티베트의 차마고도와 몽골의 오지 알타이에 이어 올겨울엔 인근에서 나체족을 볼 수 있는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으로 떠날 예정이다. 지난여름 이미 10일간 사전답사를 끝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가 문명이란 이름 아래 잃어버린 여유와 낭만을 몸에 넣고 살고 있다. 혹자는 황량하고 피폐함을 말하지만 나는 거기 그런 것이 있어 좋다.

문화전문기자 wansik@segye.com
출처: 2008.09.25 (목) http://www.segye.com/Articles/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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