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에 나온 흑산도와 상라봉 12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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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 나온 흑산도와 상라봉 12고개

 

1월 17일 <1박2일>에 나온 흑산도편은 멤버와 스텝들의 배멀미로 시작되었다. 목포항에서 약 2시간이 걸리는 흑산도는 제법 험한 뱃길에 속한다. 막배를 타고 흑산도 예리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항구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섬 일주 공영버스에 몸을 싣고 나는 우선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진리 지나 읍동, 읍동에서 12고개를 구불구불 기어올라가면 상라봉이다. 1박2일에서는 이 고갯길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소개하였다. 과장이 좀 되긴 했지만,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 정도는 될 것이다. 상라봉에서는 바로 앞에 떠 있는 장도와 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홍도와 바다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흑산도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힌다. 날이 흐린 탓인지 멀리 떠 있는 홍도는 해무에 폭 잠겨 있고, 눈앞에 길게 누운 장도(소장도, 대장도)만이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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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라봉에서 바라본 흑산도 앞바다와 장도, 홍도 풍경. 멀리 해무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홍도다.

일몰 명소이기도 한 상라봉에는 특별한 기념비가 하나 있는데,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드는데/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저 육지를 바라보다/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로 시작하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그것이다. 역시 1박 2일에서 멤버들이 이 노래비 앞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던 곳이다. 과거에는 동전을 넣어야 이미자의 구성진 노래를 들을 수 있었지만, 관광수입의 증가로 지금은 버턴만 누르면 공짜로 <흑산도 아가씨>를 들을 수가 있다. 상라봉을 내려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가면 장도가 눈앞에 보이는 비리가 나오고, 이어 한반도 지도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 일명 ‘지도동굴’ 바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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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소개된 상라봉 열두 고개.

비리를 지나면 심리와 암동이라는 멋진 갯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흑산도에서는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가장 옛 어촌의 원형을 간직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심리에서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에돌아 가파른 비포장 고개를 넘어서면 흑산도의 남쪽 끝마을인 사리가 나온다. 손암 정약전 선생 유배터(복성제)가 바로 이 곳에 있다. 사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초가에서 그 유명한 <자산어보 玆山魚譜>가 탄생한 것이다. <자산어보>에는 흑산도와 주변의 바다생물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도대체 카메라도 없고, 잠수함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 많은 해양생물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정약용의 형이기도 한 정약전은 천주교 포교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이 곳 흑산도에 유배(1801~1816)되어 남은 생을 보내는 15년 동안 <자산어보>에 매달렸다. <자산어보>는 어류나 패류의 분류가 학문화되어 있지 않은 당시에 서남해에서 볼 수 있는 155종의 해산물과 물고기를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양어류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어패류에 대한 이름과 형태, 분포와 습성은 물론 생태 및 이동경로, 방언, 맛과 약효까지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후대의 해양연구와 어패류 분류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의 업적을 넘어서는 연구가 없을 정도이다. 흑산도에서는 이런 손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예리 선착장 인근에 자산문화도서관을 마련해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어류 일부와 관련자료를 전시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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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서 멤버들이 '흑산도 아가씨' 노래를 불렀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이튿날 나는 다시 흑산도 여행에 나섰다. 예리에서 상라봉까지는 걸어서 갔고, 예리에서 천촌리까지는 섬순환 버스를 탔다. 흑산도에서의 둘째날은 비가 사정없이 퍼부었다. 진리와 읍동에서 나는 카메라를 품에 안고 오는 비를 다 맞으며 걸었다. 면소재지이기도 한 진리에는 8기의 고인돌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도로 옆엠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이 곳의 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 무리로 무덤 속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돌창, 돌그릇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진리2구인 읍동에는 처녀당과 초령목, 반월성과 3층석탑을 볼 수 있어 흑산도의 답사1번지라 할만하다.

두 채의 당집을 거느린 처녀당은 빗속에 그윽한 옛빛을 드러냈다.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진리에서는 처녀신을 모신 이 당집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오고 있다. 처녀당에는 뭍에서 옹기를 팔러 온 총각과 그 총각을 연모한 처녀신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섬으로 옹기를 팔러 온 총각은 당앞 소나무에 앉아 피리를 불었는데, 그 피리소리에 홀려 총각을 연모하게 된 당집의 처녀신은 결국 옹기를 다 팔고 가려는 총각 일행을 보내지 않으려 역풍을 일으켜 배를 띄울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런 사실을 무당에게 전해들은 일행은 총각을 몰래 심부름시켜 섬에 남겨놓고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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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를 지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 선생은 사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사리에 있는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배터.

그러나 저승의 처녀신과 이승 총각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총각은 날마다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당집 앞 소나무 밑에서 피리를 불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마을에서는 처녀신이 애틋하게 연모했던 총각의 화상을 당집에 같이 걸어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처녀당 인근에는 우리나라에 단 한 그루밖에 없다는 희귀한 초령목(천연기념물 제369호)이 있는데, 가지를 꺾어 당앞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고 하여 일명 귀신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수령 300년 정도의 초령목(목련과)은 봄에 흰색의 꽃을 피우며, 가죽 같은 질감의 잎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하지만 진리의 초령목은 최근 거의 말라죽은 상태여서 아쉬움을 던져 주고 있다.

처녀당을 벗어나 상라봉 쪽으로 오르다 보면 반월성 동남쪽 기슭 팽나무 아래 3층석탑과 석등을 만날 수 있다.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높이가 1.5미터 정도인데, 팽나무 뿌리로 말미암아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다. 읍동 사람들은 이 탑과 석등을 일러 각각 숫탑, 암탑이라 부르기도 하며, 탑영감 등으로 부르며 신성시해 왔다. 여기서 산을 타고 오르면 반월성에 오를 수 있다. 성의 모양새가 반달 모양을 하고 있어 반월성이라 불리는 이 성은 총길이 2.3킬로미터, 높이 0.5~2미터의 규모이며, 신라 때 해상왕 장보고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신라 때 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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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의 명물, 흑산도 홍어.

손암 선생 유적지가 있는 사리 가는 길목의 천촌리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 유배터도 자리해 있다. 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최익현 선생은 1876년(고종 13년) 왕실에서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는 것을 보고는 도끼를 매고 광화문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로 인해 면암은 흑산도 유배길에 오르고 말았다.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이듬해 73세의 노령으로 의병을 모아 순창 등지에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가 순절하였다. 당시 면암 선생은 적이 주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며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물론 면암 선생은 이 곳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달랑 비석만이 서 있는 풍경은 너무 쓸쓸해 보인다.

흑산도라는 이름은 푸른색이 짙어서 검게 보인다는 뜻이 담겨 있다. 흑산도는 신라 때(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나서 서해 바다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 노릇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과거 흑산도가 어업전진기지였을 때만 해도 포구에는 수백여 척의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꽤나 번화한 섬이었다. 그러나 대형 첨단어선들이 늘어감에 따라 흑산도의 예리항은 점점 쇠락해 갔고, 최근 들어서야 다시 관광지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서남쪽에 위치한 흑산도는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쳐 크고 작은 섬을 무려 100여 개나 거느리고 있고, 본 섬의 해안선 길이만도 40킬로미터가 넘는 제법 커다란 섬이다. 특산물은 너무나도 유명한 ‘흑산도 홍어’다.

* 나만의 청정 섬여행::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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