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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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돌아왔다

 

 

고래가 돌아왔다. 지난 봄 전원주택의 절대권력묘였던 아롱이에게 쫓겨났던 고래가 돌아왔다. 얼마 전 장마가 거의 끝나가던 날이었다. 전원주택에 사료를 전하러 갔더니 거기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고래 녀석이 개집에서 기어나오며 냐앙냐앙 우는 거였다. 어찌된 일일까? 때마침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어젯밤에 고래가 왔어. 반야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개집에서 자더라고.” 반야는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주고 그 앞에서 보초 서듯 엎드려 자더라는 것이다.

 

전원주택으로 다시 돌아온 고래 녀석, 뒤란에서 맘 편히 쉬고 있다.

 

고래는 지난 늦봄에도 땅에 끌릴 만큼 부푼 배를 하고 전원주택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 때도 녀석은 반야의 집을 빌려 새끼를 낳았더랬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녀석이 낳은 새끼는 모두 죽어서 나왔다. 사산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고래는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다시 아롱이에게 쫓겨났다. 그 뒤로 고래는 전원주택 아래쪽 소나무밭과 묏등 너머 뽕나무와 앵두나무가 우거진 덤불숲을 오가며 동가식서가숙하였다. 나 또한 전원주택에 오는 날이면 그런 고래를 찾아서 따로 먹이를 건네주곤 했다. 고래의 바깥생활은 그야말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사산을 한 뒤로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는지 등 아래쪽에 털이 다 빠질 정도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녀석이 참을 수 없었던 건 마음의 상처였다.

 

금순이와 호순이, 꼬맹이를 제외한 다른 고양이들은 돌아온 고래에게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다.

 

정든 영역에서 쫓겨난 데다 사산까지 한 마음이 오죽했을까. 고래는 점점 전원주택에 발을 끊었다. 정 배가 고플 때면 먹이동냥을 오긴 했지만, 아롱이와 몇몇 고양이는 그조차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 어느 날 전원주택의 절대권력묘 아롱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꼬맹이에게 맡기고 전원주택을 떠나는 묘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전원주택에서 쫓겨났던 산둥이는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데리고 전원주택으로 돌아왔다. 고래는 장맛비가 한창일 무렵 먹이동냥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다시 돌아온 산둥이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사산을 한 뒤로 녀석은 다시 임신을 했는지 배가 점점 불러왔는데, 녀석에게는 무엇보다도 비 맞지 않을 안전한 출산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고래는 부푼 배를 이끌고 전원주택으로 돌아왔다.

 

전원주택 현관과 잔디마당에서 고래는 이제 예전처럼 그루밍도 하고, 발라당도 한다.

 

까칠한 권력묘 아롱이가 떠났다고는 하지만, 전원주택에는 여전히 고래와 산둥이의 귀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금순이와 호순이, 꼬맹이 등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롱이처럼 대놓고 고래와 산둥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고래는 그래도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반야가 기거하는 개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지난 번 사산을 했던 불길한 장소였지만, 녀석에게는 따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 봄부터 초여름까지 갖은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날들을 보냈던 고래는 그렇게 전원주택으로 돌아와 다시 전원고양이의 일원이 되었다.

 

할머니가 고래에게 오징어포를 먹이고 있다(위). 장독대 앞에 앉아 있는 고래(아래).

 

예전처럼 고래는 잔디밭에서 뒹굴었고, 폐가구 위에 올라가 낮잠도 잤다. 할머니는 산둥이에 이어 고래가 돌아오자 녀석들의 간식을 챙기느라 바빠졌다. 어떤 날은 앞마당고양이 몰래 뒤란에서 산둥이와 고래에게 안주용 오징어포를 가져와 손수 찢어서 공평하게 먹여주었다. 하지만 냄새를 맡은 앞마당 녀석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녀석들이 우르르 뒤란으로 몰려오자 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오징어포를 들고 앞마당으로 가 사료그릇에 나머지 오징어포를 찢어 내놓았다.

 

출산을 위해 전원주택으로 돌아온 고래는 얼마 전 새끼를 낳았고, 여섯 마리 모두 사산을 했다. 녀석은 지난 봄에도 사산을 했었다.

 

고래가 돌아왔다. 이제 녀석은 비가 줄줄 새고 물이 넘쳐흐르는 계곡의 덤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지 않아도 된다. 낯선 고양이와 등산객의 발길에 쫓겨 소나무숲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안전한 둥지를 찾아 이곳저곳 떠돌지 않아도 된다. 엊그제는 돌아온 고래의 소식이 궁금해 전원주택을 다시 찾았는데, 할머니가 손짓을 하며 고래를 가리켰다. 현관 앞 둥지 속에 고래가 누워 있었다. “하이구 고래가 새끼를 여섯 마리를 낳았어. 근데 네 마리나 죽어서 나왔드라구. 두 마리는 살아서 저 박스 속에 넣어놨는데, 아침에 나와보니 그것마저 가버렸어.” 이번에도 고래는 사산을 한 것이다. 안전한 출산을 하기 위해 돌아온 고래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나를 보면 언제나 잰걸음으로 마중나오던 고래 녀석이 어쩐지 박스 안에서 기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고래야!” 하고 부르자 겨우 일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나에게 오는 대신 수돗가로 가서 한참이나 찬물로 목을 축이고 울타리 감나무 그늘로 가 앉았다. 돌아앉은 고래의 뒷모습은 한없이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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