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거지탑에 대한 새로운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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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거지탑에 대한 새로운 조명: 파격이 주는 감동



돌덩이를 다듬지 않고 본래 모양대로 갖다가 탑몸에 앉혀 자연미와 파격의 미를 함께 갖춘 운주사 거지탑. 유홍준 교수는 감은사지 석탑을 최고의 탑으로 꼽았지만, 나는 감히 이 탑이 우리 땅의 가장 아름다운 탑이라고 말하겠다.

 

운주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탑이 9층 석탑이다. 10미터가 넘는 이 탑은 운주사에서 가장 높고 잘 생긴 탑으로 손꼽히는데, 일설에는 이 탑(백제계 석탑)이 운주사를 떠받치는 돛대탑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운주사에서 내 눈길을 잡아끈 탑은 이것이 아니다. 9층 석탑에서 눈길을 돌려 오른편 산을 보면 9층 석탑보다도 한발 앞선 자리에 모양 없게 들어선 탑이 하나 있다. 거지탑이다. 못생긴 이 탑은 마치 운주사라는 잔치집 대문 앞에서 동냥하듯 자리를 차지했다. 저런 거지같은 탑이 무슨 매력이 있다고, 누군가는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거지같은 모양새야말로 거지탑의 진정한 매력이다.


이제껏 국내의 어떤 학자도 이 탑에 주목하지 않았다. 작고 볼품없는 거지탑은 그들의 눈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일본에서 온 어떤 학자는 우리나라의 여러 불탑을 둘러보고 난 뒤에 운주사 거지탑을 최고의 탑으로 꼽았다. 탑의 형식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이 탑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몇몇 젊은 소장파 학자들도 운주사 거지탑의 매력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탑을 건축의 관점이나 규모와 용량의 관점이 아닌, 예술과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거지탑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거지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운주사 맨 뒤쪽에 자리한 항아리탑.

 

내가 볼때 거지탑은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꾸며진 아름다움, 즉 무작지작(無作之作)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특히 탑날개(옥개석)를 보라. 넓적한 돌덩이를 다듬지 않고 본래 모양대로 갖다가 탑몸에 앉혔다(다듬어 앉힌 것이 닳아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여 탑날개의 모양이 층층이 똑같은 것이 없다. 모나면 모난대로, 깨진 건 깨진대로 그냥 탑몸에 올려놓았을 뿐이다. 네 귀를 딱딱 맞춰 반듯하게 다듬어 쌓은 다른 석탑들은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든 그 모양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충 올려놓은 것같은 거지탑은 보는 각도에 따라 탑의 모양새가 모두 달라진다. 그것은 탑이라는 형식을 일거에 깨뜨려버린 ‘파격의 미’를 제시한다.



9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운주사의 탑과 불상들.

 

애당초 탑이라는 종교적 기념물은 으레 한껏 멋을 내거나 최대한 솜씨를 부려 아름다움을 뽐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거지탑만큼은 그런 탑의 관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일찍이 나는 석가탑이나 다보탑, 감은사지 석탑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동’을 이 자그마한 거지탑에서 받았다. 그것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동반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운주사의 대표탑이라는 9층 석탑보다 이 거지탑이 한 발짝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인데, 만일 운주사가 하나의 배이고, 천불천탑이 선원이라 가정했을 때 가장 앞선 뱃머리에 거지가 올라탄 셈이다. 거지는 선원 중에 가장 미천한 자이며, 가장 못배웠고, 가장 슬프고 가장 낮은 자이다. 또한 가장 외롭고, 가장 추우며, 가장 배고픈 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륵은 바로 그런 자의 손을 가장 먼저 잡아줄 것이다. 거지탑이 한발 앞에 나와 있는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내 생각일 뿐이며, 그렇게 여기면 거지탑은 훨씬 의미심장해지는 것이다. 절집에서 맨 뒤쪽에 자리한 항아리탑(원형구형탑)도 눈길을 끈다. 마치 집 뒤란에 항아리가 놓인 장독대가 있듯 항아리탑은 절 뒤란에 자리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탑의 모양이 스님들의 공양그릇인 발우를 닮았고, 밑에서부터 큰 그릇을 쌓듯 채곡채곡 쌓아올린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발우보다 항아리가 더 어울린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이 탑은 7층이었으나, 꼭대기 3개 층이 소실되어 현재는 4층만이 남은 상태이다.

 


운주사 요사채의 기와 담장.

 

흔히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을 천불천탑이라 부른다. 1481년 발간된 <동국여지승람>과 1632년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천불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1천기씩 있었다”는 동일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천불천탑이 그저 많다는 의미가 아닌, 실제로 존재했음을 역력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이 많은 불상과 석탑이 소실된 결정적인 원인은 1598년 임진왜란에 이은 왜군의 2차 침략인 정유재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사된 기록에는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마저 확연히 줄어서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모르긴 해도 옛날에는 거지탑 옆에 곰보탑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며, 그 옆엔 또 문둥이탑이, 또또 그 옆엔 앉은뱅이탑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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