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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0 비 오는 창밖의 시

비 오는 창밖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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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창밖의 詩: 비내리는 8편의 詩

 



그러니까 도서관 귀퉁이에 얌전하게 꽂힌 시집같은 것은 그저 대꾸없이 입 다물고 꽂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껏 대중가요나 1회분 드라마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도 그냥 그래왔듯 시인은 소주 한잔 목구멍에 털어넣으면 그만이다. 2007년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한복판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비 오는 창밖의 詩처럼 그것은 부질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쏟아져내린 비와 같은, 이미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증발해버린 그것들을 나는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 이 테크놀러지와 디지털의 변방에서……. 억수같이 비 오는 창가에서……. 더러는 요절하고, 더러는 젊어서 두려움 없는 시인들은 이렇게 오는 비를 받아적었으나, 받아적을 수 없는 비극은 저렇게 온종일 밖에 있다. 

 


 

춘천 悲歌 1


비는 내리지 않을 비를 뿌리듯 내린다

깊이 없이 나뭇잎은 떨어져 일년을 헛산다

우리들이 서 있는 한 지점으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서 바람은 폭풍을 먹고 와

우리들을 더 먼 세계로 날려보낼 것이다

그래, 우리는 먼지로부터 태어나 먼지로 사라질 세대

악마의 수레바퀴들, 그 바퀴들의 회오리, 유적과 홍수

이제 생은 후회되지 않고 망해버릴 뿐이다

인간은 사라지지도 낳고 죽어지지도 않고 팽개쳐져

빌딩의 긴 그림자 속에 파묻힌 나무들의 둥글고 긴 그림자만이

오래 어둠을 응시하리라, 어디론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

결국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회환, 외로움의 연기들이

이 안개성에서 쓸쓸하게 노을로 저무는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우리들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속으로

걸어가 몇 장의 편지를 불태워버릴 것이다

보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추억은 이미 식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계절은 너무 빨리 우리를 추위 앞에 갖다 바치고

지금 서러운 사람은 외투가 없는 나무들뿐이다

쇠기둥처럼 서 있는 가을에서 겨울로의 나무들 사이로

새들은 지폐처럼 날아가다 둥지로 힘겹게 흩어진다

잘 있거라, 언어를 망친 세대들이여

잘 있거라, 좋은 세계에서 살기 틀린 세대들이여

태백준령 깊은 곳에서 바람은 스르르 흘러와

최후로 남은 나뭇잎을 콱 활퀴어 버린다

생은 계속 되어지지 않는다

생은 계속 죽어갈 뿐이다


-- 박용하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중앙일보사) 중에서



 

헤비메탈 같은 비

                            

무엇을 원하는지

하늘의 기타줄이 끊어졌는지

거리를 치렁치렁 기른 빗줄기들이

새벽부터 내 창문을 두드렸다

헌데, 찰나 나의 망상은 최치원의 한시로 달려갔던 거다

이런 것이 문화의 힘이고, 전통의 생명력일까

내가 빗줄기를 헤비메탈 같다고 느끼는 사이

내 마음 속에선

창밖에 삼경의 비 내리는데

등앞엔 만리의 마음 달리는구나

라는 시구가 떠오른 것이다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나의 무식과 무교양을 한참동안이나 탓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는 새벽 라디오의 기상예보조차

내겐 이상스레 들리는 거였다

전국이라니 어느 나라의??

당나라, 아니면 대식국?

천축국, 나란타 대학의 한모퉁이엔

향수를 이기지 못한 서라벌의 승려가 아직도 누워 있다

<메탈리카> 같은 빗줄기 속에서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중에서



 

부재중(不在中)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 안에서 저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몇 십 년 전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충혈된 빗방울이 창문에 눈알처럼 매달려 빈방을 바라본다 창문은 이승에 잠시 놓인 시간이지만 이승에 영원히 없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내 안의 인류(人類)들은 그곳을 지나다녔다 헌혈 버스 안에서 비에 젖은 예수가 마른 팔목을 걷고 있다 누워서 수혈을 하며 운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나니 너희는 평생 내 안에서 갇혀 있을 것이다 간호사들이 긴 꼬리를 감추며 말한다 울지 마세요 당신은 너무 마르셨군요 요즘은 사람들의 핏줄이 잘 보이지 않아요 우산을 길에 버리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는 빗속을 떨면서 걸어간다 죽은 자들이 다가와 우산을 씌워준다 곧 홍수가 나겠어요 성(成)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군요 나는 나의 성(星)을 잃어버렸네 성(性)을 중얼거리는 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을 기억해내려는 그들은 비 맞으며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발광(發光)한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끼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하늘의 경야(經夜)가 떨어진다 예수가 내 방의 창문 앞에 와서 젖은 손톱을 들어 유리를 긁는다 성혈이 얼굴에 흘러내린다 나는 돌아온다 말하자면 이 문장들은 生을 버리고 성(聲)의 세계로 간 맹인이 드나드는 점자들이다


--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중에서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지) 중에서



 

장대비 멎은 소읍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남긴 뽕잎 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담한 놈도 개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꽃마냥 곳곳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멎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 문태준 <맨발>(창비) 중에서



 

소낙비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어느날은 온종일을 날카로이 가릉거리다가 턱을 쓰다듬는 내 손끝을 날렵하게 깨물고

놀란 내가 등짝을 때려도 떨어지지 않던 날처럼

햇빛 드는 쪽창가에 앉아 배어나온 피를 할짝할짝 핥아먹던 날처럼

너를 안다가 나도 모르게 송곳니가 가려워져

너의 빗장뼈, 너의 목 언저리, 너의 귓불 깊숙하게 날랜 이를 박고 싶은 날처럼


소박비 내린다

송곳니를 박으며

핏물을 할짝이며


쪽창에 몇 방울 신산한 것이 되어 뭉쳐있는

향그러운 비린내


소낙비의 어금니와 송곳니 사이로

내가 걸어 들어간다


얼음장을 끌어안고 산 것과 죽은 것 사이를 드나들던

겨울 연뿌리처럼

계절이 바뀌기 전에 몇 광주리의 피를 들이켜야 했던 날들처럼

서로의 몸에 깊숙이 이를 박은 쪽창과 창틀처럼


--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중에서


 

저무는 가마솥


할머니 오늘도 물 끓이시네

비 오는 이 산은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무덤은 뒤집힌 가마솥처럼 캄캄해지고 있네

할머니 한평생 물 끓이시다가

낡고 커다란 가마솥 속으로 돌아가시고

안 나오시네 나는 가마솥 깊숙이 구불구불 이어진

강물을 바라보네 저 여자 어쩌자고 자꾸

떠내려오는 핏덩이를 건져올리고 있나

아무도 몰래, 물끝으로 달려가는 말발굽소리

무덤을 둘러싼 저녁이 그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어둠에서 풀려나는 시간

물속에서 홀로 끓고 있는 불꽃을 보네

들끓는 대지 위에 타닥타닥 타오르는 굵은 빗줄기

나는 그 굵은 장작 몇 개 골라 아궁이에 넣어주네


-- 김중일 <국경꽃집>(창비) 중에서



 

슬픈 온기


비가 내렸고, 아궁에 물이 스몄다. 아버지, 삭정이 같은 팔을 뻗어 눅눅한 신문지 모서리에 성냥을 그어댔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불이 붙어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짙은 연기가 뱀처럼 부엌바닥을 기어 다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훅, 바람을 일으키던 아버지 입에서도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물 위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아직 어린 누이가 어두운 방안에 누워 열꽃을 피웠고, 나무 몇 토막 살 밖으로 끓는 수액을 밀어내며 타들어갔다. 검은 솥단지가 칙칙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굴뚝의 인후부를 간질이며 피어 오른 연기가 쓰러진 나무처럼, 하늘 바닥에 엎드린 채 비에 젖고 있었다.


--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중에서

 

 


* 글/ 정리/사진: 구름을유목하는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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