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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2 하늘에서 본 섬의 미학 (5)

하늘에서 본 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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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미학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언제나 미화되곤 한다. 땅위의 현실이 아무리 지옥 같아도 하늘에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낙원으로만 보인다. 그것은 얼마든지 미화되고 과장되어도 좋다.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라도 아름다워서,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하늘에서는 구름과 산과 강물과 바다와 섬이 서로 엉키고 풀어지고, 어루만지고 비껴앉아서 서로의 풍경을 돕는다. 하늘에서는 땅위의 작고 사소한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늘에서는 추악한 것도 오염된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구가 하늘에서 본 풍경만 같다면 얼마든지 살기 좋은 그런 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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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연기처럼 구름이 떠 있는 서천 연도의 풍경.

하늘에서는 육지보다도 바다, 바다보다도 섬의 풍경이 가장 황홀하다. 섬은 바다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바다는 섬의 외로움을 잠재운다. 그것은 굳이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체로 미학적이다. 바다에 뜬 섬은 때로 한척의 고깃배만 하고, 푸른 물결을 헤치고 가는 배들은 고작 물고기만하다. 하늘에서 보면 서해안부터 남해안까지 배만한 섬들과 물고기만한 배들로 그득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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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절해고도 여서도(위)와 늘 푸른 섬 청산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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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러 번 제주도행 비행기에서 바다와 섬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섬을 여행하지 않았을 때는 발밑으로 보이는 저 섬이 무슨 섬인지 알 수가 없었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4년간 섬을 찾아 표류하고 난 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커다란 섬의 이름을 더러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늘에서 보는 섬은 땅을 밟고 보는 섬과는 영판 다른 모습인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한번은 남해안을 지나며 창 아래로 여서도가 펼쳐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와락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4년간의 아득한 섬 여행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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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는 길에 만난 푸른 바다.

하늘에서 보면 서해 바다의 빛깔은 일찍이 배를 타고 만나던 누런 빛깔이 아니라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매혹적인 빛깔을 띤다. 거대한 인천대교를 지나면 대부도의 푸른 들판과 팔미도, 승봉도, 이작도, 덕적도로 이어지는 섬들의 실루엣이 바다와 어울려 기막힌 수채화를 그려낸다. 만경강을 지나 김제 들녘을 벗어나면 변산반도의 산자락 너머로 가물가물 숨쉬는 선유도가 보이고, 고슴도치 형상의 위도가 보인다. 여기서 하늘길은 뭍으로 들어섰다가 남해안에 이르러 다시 바다를 만나는데, 이곳의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다도해. 그지없이 푸른 바다 위에 섬들은 그야말로 새떼처럼 흩어져 있다. 앞바다에 청산도와 보길도가 보이고, 조금 더 가면 먼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뜬 여서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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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팔미도와 그 인근의 바다. 하늘에서는 서해의 빛깔도 에메랄드처럼 보인다.

여서도를 지나 잠시 눈 몇 번 깜박이고 나면 이제 푸른 바다와 구름의 바다 너머로 불쑥 신비의 산이 하나 솟아나온다. 한라산이다. 구름바다 너머로 솟구친 한라산은 그 어떤 비경보다 경탄스럽다. 하늘에서 보면 제주도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신비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다. 한라산이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 새 북제주의 청옥빛 바다가 아른거리고 이내 눈이 시린 초원이 펼쳐진다. 그 초원 위로 순전히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돌담이 기막힌 굴곡을 이루며 핏줄처럼 뻗어 있다. 신비와 경이, 감탄과 감동이 버무려진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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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인근의 다도해 풍경(위)과 부안 변산반도 너머로 보이는 위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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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세월 섬은 나의 원더랜드였다. 때묻지 않은 순진한 풍경과 순결한 가치가 그 속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섬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시간의 박물관이었다. 뭍에서 진즉에 사라진 것들과 섬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유산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단절과 고립으로 간신히 섬에 남은 비릿한 것들은 육지의 시간에 채이고 발길에 무뎌지면서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안타까워 이 섬 저 섬 표류했다. 그것을 수첩에 적고 사진으로 남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섬을 여행할수록 기록에 대한 강박은 헐겁고 느린 방랑으로 바뀌었다. 그저 섬을 여행하는 것이 좋았다. 이대로 평생 섬만 떠돌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4년을 표류했고, 그것에 대한 기록은 최근 <물고기 여인숙>이란 책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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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쪽 하늘에서 본 운해에 뒤덮인 한라산.

섬의 시간은 분명 뭍의 그것보다 느리게 흘러간다. 낯선 행성에 떨어진 느낌, 바다 끝에서 떠오른 태양은 천천히 갯벌을 가로질러 어선의 꽁무니를 좇아간다. 경쟁과 발전에서 밀려난 듯한 시간의 변두리. 섬을 여행하는 동안 바다는 끊임없이 내게 중얼거렸다. 바다가 읽어주는 섬은 내내 아름답고 눈물겨웠다. 그것은 더러 나를 동심의 세계로 밀어넣었고, ‘오래된 미래’로 이끌었다. 오직 섬의 바람과 구름과 파도와 비릿한 시간만이 나의 섬 여행을 부추겼다. 나는 다만 섬이 보여주는 풍경 속을 타박타박 걸었다. 어떤 날의 사랑은 일찍이 썰물이 되었지만, 어느 날의 이별은 뒤늦게 노을이 되었다.

*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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