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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31 "먹고 살기 참 힘들다" 32

"먹고 살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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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집을 찾는 길고양이 바람이는 오늘도
테라스 아래 웅크리고 앉아서 밥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이 녀석에게 밥을 준 지도 거의 10개월이 다 되었건만,
바람이는 좀처럼 애교 있는 먹이구원행동도, 발라당도, 심지어 1~2미터 이내의 접근까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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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 밥그릇은 또 어디다 치운 거야! 아 놔...미친 거 아냐..."

녀석의 행동은 늘 변함이 없다.
테라스 아래 앉아 있다가 밥이 좀 늦는다 싶으면 테라스 위로 올라와 ‘왔다는 신호’를 보낸 뒤,
다시 테라스 아래로 내려가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
녀석의 표정 또한 변함이 없다.
기쁨과 슬픔, 불만과 기대, 불안과 평화를 표현하는 표정이 다 똑같다.
입을 굳게 다물고 미간을 살짝 찌푸려 예의 그 뚱한 표정을 짓는 것.
하긴 그 뚱한 표정이 바람이의 매력이긴 하다.
그래도 좀 살갑게 굴면 어디가 덧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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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도 없고... 어이 랭집사 정말 이러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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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유로 바람이는 우리집을 근거지로 삼고 있음에도
좀처럼 녀석을 소개하기가 곤란했다.
노출도 안 떨어지는 어둠 속에 웅크린 녀석을 매번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녀석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밖으로 불러내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결국 먹이로 유인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바람이를 처음 소개한 뒤로
바람이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음에도
바람이를 자주 올리지 못하는 고충이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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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기 마당 끝에다 둔 거야...? 나 보고 이 눈밭을 헤쳐가라고...?"

이사를 한 뒤 거의 처음 소개한 길고양이가 바람이였으므로
올해 마지막도 바람이의 소식으로 마감하는 게 좋을 것같아
오늘 나는 바람이에게 어쩔 수 없이 못할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먹이그릇을 놓아두던 장소를
마당 끝에다 옮겨놓은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별일도 아닌 일이지만, 몇며칠 눈이 수북히 쌓인 마당인지라
바람이는 못내 테라스 위에서 짜증과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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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눈밭 걷는 거 싫어하는 거 그걸 알려줘야 아나? 저번엔 나한테 독재자라고 막말을 해대지 않나...요즘 내가 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만 알아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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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는 표정이었다.
“먹고 살기 참 힘들다”며 짧은 한숨도 내쉬었다.
그래도 일단 ‘먹은 뒤’에 생각하자며
바람이는 테라스를 뛰어내려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마당을 가로질러 먹이그릇을 향해 걸어갔다.
그동안 내린 눈에 또다시 쌓인 눈이라서
바람이는 거의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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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또 이건, 그걸 또 왜 치워?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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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차가운 눈밭에서 식사하는 게 못내 미안해 나는 얼른 사진만 찍고
도로 테라스 아래로 먹이그릇을 옮겨주었다.
그러자 바람이는 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이게 뭥미?” 하는 거였다.
‘쩝’ 하고 쓴 입맛도 다셨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길고양이를 만나 왔지만, 이 녀석처럼 ‘꼬시기’ 힘든 고양이는 정말 처음이다.
바람아! 내년에는 좀 친하게 지내보자.
마당에 나와 발라당이라도 좀 하면 어디가 덧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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