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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5 예부터 소를 '생구'라 불렀던 까닭 15

예부터 소를 '생구'라 불렀던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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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생구’라 불렀던 까닭


봄 밭갈이 하는 풍경.

실오라기 같은 논두렁길에 덕석을 씌운 암소가 앞장서고, 아직 코뚜레도 하지 않은 송아지가 줄레줄레 뒤따른다. 그 뒤에는 고삐를 쥔 농부가 이랴이랴, 어뎌뎌뎌, 하면서 소를 몰아가고 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종종 만날 수 있는 소몰이 풍경이다. 소는 집안에 두고 키웠지만, 날이 따뜻해지고 들판이 푸릇한 잡풀로 우거지면 되도록 풀밭에 내다 매었다. 겨우내 먹은 여물죽이 지겨웠던 소로서는 향긋한 풀을 맘껏 먹을 수 있고, 농가에서는 따로 여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이래저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모내기철과 추수철이 되면 소는 덩달아 바빠졌다. 논갈이와 논삼기, 볏섬 나르기가 모두 소가 해야 할 몫이었다. 소가 힘을 쓰는 날이면 농부는 쇠죽에 겻가루와 쭉정이콩을 듬뿍 넣은 특별식을 해 주곤 하였다. 옥수숫대나 수숫대궁도 덤으로 먹였는데, 이는 소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나면 소 팔자도 한결 좋아졌는데, 농부도 농사 밑천인 소를 어여삐 여겨 추위가 심해지면 소의 등에 덕석을 덮어 춥지 않게 해 주었다. 지역에 따라 덥석, 덕새기라고도 불리는 이 덕석은 짚으로 엮은 겨울용 소옷이었는데, 겨울 나들이를 나서는 소의 모습은 이 덕석으로 인해 더 운치가 있었다.


덕석을 입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외양간 밖을 내다본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소를 생구(生口)라 하여 다른 가축과 달리 한 식구로 여겼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식구라는 뜻이다. 농경문화의 바탕에서는 소가 없어서는 안될 가축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생구’라 했던 것이다. 사실 경운기가 생기기 이전만 해도 힘깨나 쓰는 일은 모두 소의 힘을 빌어야 했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송아지는 팔아서 농사 밑천 하고, 외양간에 깔았던 짚북세기는 나중에 퇴비로 썼다. 그러니 소를 한 식구로 여겼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소의 노고를 기리는 뜻에서 소에게도 오곡밥을 먹이는 관습까지 있었다.


창문처럼 뚫어놓은 외양간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착한 소.

날씨가 따뜻한 중부 아래 지방과 평야지대에서는 소를 헛간 한 켠 외양간에 두어 길렀지만, 날씨가 추웠던 경북 북부와 강원, 중부 산간지대에서는 거개의 집들이 외양간을 부엌에 두었다. 이들 지역에서 소를 밖에 두지 않고 부엌에 두었던 까닭은 그만큼 소라는 가축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산간 마을에서는 산짐승의 습격이 잦았으므로 소를 집 내부에 두어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 날씨가 추운 지역이라 부엌의 아궁이 온기를 외양간 소에게까지 쪼이게 하려는 배려도 담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식구처럼 여겼던 소도 언젠가는 팔아치워야 한다. 힘이 다해 농사를 질 수 없거나, 새끼를 낳아 두 마리를 다 먹일 수 없을 때는 둘 중 한 마리는 우시장에 내놓아야 했다. 우시장에 소 팔러 가는 날이면, 소도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여물도 먹지 않고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다 결국 굵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움머 움머 우는 소를 외양간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농부의 마음도 편치 못해 우시장까지 가는 길이 그저 허허롭고 안쓰러워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내 소를 팔고 온 농부의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와 쇠고기 한 근이 들려 있었지만, 마음에는 내내 봉투보다 더 두툼하고 쇠고기보다도 더 묵직한 허전함이 짓누르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구멍 뚫린 외양간 벽틈으로 보이는 소의 실루엣.

그러나 경운기가 생겨나고, 새로운 농기계들이 속속 보급되면서 농촌에서조차 소들은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비육우로 키우는 한우마저 미국산 쇠고기 개방으로 더 이상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우는 고유한 우리의 품종으로 성질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다. 빛깔은 적갈색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적갈색에 검은 무늬가 있는 얼룩배기 칡소도 있었다. ‘생구’라 부를 정도로 친근하고 한 식구처럼 여겼던 한우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한우 농가는 지금 생구를 우시장에 내다 파는 심정보다 더한 서운함과 슬픔에 잠겨 있다. 더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 농부들의 마음은 지금 배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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