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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5 박정대 <短篇들> 1

박정대 <短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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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篇들
                   
                                                                   박정대



1 워터멜론 슈가에서

물이 끊고 있다. 가습기 같은 내 영혼, <아스펜 익스트림>이란 영화를 보고, 눈이 쌓인 설원을 생각했어야 되는데 진로 소주 한 병의 위력에도 휘정거리는 아스펜 아스피린 같은 혼몽한 겨울밤. 비명처럼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옛날처럼 나는 늙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오늘은 누가 또 미국의 송어낚시를, 피워무는지 몰라도 무섭도록 그리운 건 담배 한 개피 속에 떠오르는 춥디추웠던 그 골방의 기억뿐,

겨울밤엔 담배가 필요해 洋 누군가 와줬으면 해. 워터멜론 슈가에서 나 기다려.

난초 한 뿌리에 잎사귀는 열아홉 개. 거미는 다리가 여덟 개. 하늘에는 쌍둥이 구름이 흘러가고 디셈버는 십이월, 옥토버는 시월, 사월은 에이프릴. 앞치마 같은 女子들.

난초를 마신다, 가습기 같은 내 영혼, 고장난 지붕 위로 비가 내려 난초를 한 컵 마시고 그는 위해서 운다. 난초잎 속의 女子들, 女子들 속의 난초잎. 쌍둥이 구름에 관한 기억들이 거리를 걸어간다. 푸르게 돋아나는 거리에서 그는 취해간다. 포켓볼 같은, 핀볼 같은 生, 베나레스에는 아직 벵갈호랑이가 살아 있고 호랑이는 다리가 3개.

2 페루여관에서

그 거리를 지나 그들이 당도한 골목 끝에 섬처럼 여관이 하나 떠 있었다. 여관은 검객의 차양모 같은 지붕을 뒤집어쓰고 낡은 간판을 펄럭이고 있었는데 여관의 이름이 취생몽사였는지 동사서독이었는지 난초 잎사귀 속의 호랑이였는지 호텔 바그다드였는지 페루여관이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암튼 그들은 지친 육체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한 가엾은 한 쌍의 새였다. 동사가 티브이를 틀었고 서독은 침대 위에 무너져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누워 있었는데 동사와 서독 사이로 바람이 불고 바람은 화병에 그려진 벵갈호랑이를 피워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티브이 화면에서도 심하게 바람이 불고 지익 직 소리를 내며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폭설 속에서 밤은 또 워테멜론처럼 푸르게 푸르게 익어 가고 있었을 것인데, 동사의 담배연기만이 벽에 걸린 액자 속 여인의 두툼한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여인은 동사의 담배연기가 간지러웠던지 맥주잔을 든채 몸을 비비꼬고 있었는데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태평양의 산호섬이 보이고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서독은 액자 속 야자수 너머의 어떤 한 점을 응시한 채 계속 말없이 누워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담배를 물려주며 동사는 그가 지나온 거리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 담배를 피워문 채 동사는 다리를 지나 서독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피워문 채, 담배가 다 타는 동안만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가벼워졌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동사가 물었다. 네 몸이 나를 거볍게 해, 그렇게 대답하며 서독은 동사의 몸 한가운데를 물고 다시 어디론가 날아올랐다.

(중략)

4. 거리에서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발성연습 좀 해봤어요).

나는 티브이를 끄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더 이상 쓰레기를 볼 수 없다고
더이상 힘이 없다고
나는 거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고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 뛰어나갔다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그리고 이 밤을 자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요 사흘째나 비가 와요
비록 라디오에서 그늘도 더운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하지만 하긴 내가 앉아 있는
집 안 그늘은 마르고 따스해요
아직이라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도 빨리 흘러요 하루는 밥 먹고
삼일은 술 마셔요
창 밖에 비가 오지만 재미있게 살아요
오디오가 고장나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어도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은 끝날 거예요 그래요

창 밖에는 공사중이에요
크레인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옆의 레스토랑이 5년째 휴업해요
책상 위에는 병이 있고 병 안에는 튤립이 있어요
창턱에는 컵이 있어요
이렇게 해가 지고 인생이 흘러가요
참으로 운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운좋은 날은 오겠지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갓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어는 죽은 가수의 노래가, 여름이라는 노래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너무 가까운 거리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네.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휘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네. 가수의 노래가 천 개의 귀를 흔들고 있었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영혼이 천 개의 추억을 마구 흔들고 있었네. 마침표가 없는 걸음들이 끊임없이 쉼표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염소처럼 나는 담배만 피워대고

(중략)

6 취생몽사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 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가려 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生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 박정대 <短篇들>(세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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