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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6 박정대 <그리고 그 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박정대 <그리고 그 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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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박정대


 

1. 처음에

  처음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네, 때로는 침묵이 악기처럼 울릴 때도 있는 법, 나는 다섯 개의 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심장은 단하나 밖에 없었네, 단 하나의 심장으로도 사랑은 시작되는 것,  바람은 고요히 나뭇잎들을 흔들지만 처음부터 나뭇잎은 단 하나의 심장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라네, 처음에는 아무런 노래도 할 수 없었네, 그러나 침묵이 악기처럼 울릴 때, 노래는 그리움의 상처로부터 돋아나는 달빛의 새살, 바람이 없어도 저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라는 것을, 나의 기타는 아네, 다섯 개의 검에 베어진 심장을 지닌 나의 기타는 아네, 자신의 상처가 노래임을, 상처받은 한 마리의 고통, 하나의 심장이 노래의 유일한 근원임을


  2. 지나간 후에

  그래서, 기타를 한구석에 밀어두고, 그래서 나는 그 여인이 처녀인줄 알고 강가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남편이 있었다, 때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시골의 잔치가 끝나가는 축제의 밤이어서 모든 등불이 다 꺼져 있었고 귀뚜라미만이 울고 있었다, 아주 후미진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녀의 잠든 유방을 애무했다, 그러자 그녀는 잘 익은 석류처럼 순간적으로 활짝 열려오는 것이었다, 가볍게 풀을 먹인 속치마는 열 개의 칼에 찢긴 비단 조각같이 나의 귓전을 울려주었다. 가지와 잎에 달빛도 받지 않고 나무들은 잘도 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멀리 강 건너 어두운 벌판에선 개가 짖어대고 있었다, 산딸기와 등나무 덤불 그리고 가시나무숲을 넘어 그 밑에 오목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나는 넥타이를 풀었고 그녀는 옷을 벗었다, 나는 허리띠를 풀었고 그녀는 네 개의 속옷을 벗었다, 목화송이도 달팽이도 그렇게 보드라운 살결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달빛을 받은 수정도 그렇게 맑게 빛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살결은 놀랜 물고기같이 내게서 미끄러져 빠졌고, 근육의 반은 뜨겁게 타는 불, 반은 차가운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삐도 안장도 없는 진주로 된 어린 말을 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 중의 길을 달렸다, 그 남자를 위해, 그녀가 내게 고백한 사연은 말하지 않으련다, 이해의 빛은 무척 나를 신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포옹과 모래로 불결해진 그녀를 데리고 강으로 부터 나는 나왔다, 공중에서는 백합의 칼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나는 나답게 행동을 하였다, 정통의 집시답게 말이다, 난 그녀에게 노란색 비단으로 수놓은 커다란 바느질함 하나를 선사하였다, 그러나 내가 강가로 데리고 갈 때, 남편을 가졌으면서도 처녀라고 말한 그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3. 그 다음에

  그래서,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을 덮고 나니 에리 쿠스트리차의「집시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전인권의「사랑한 후에」라는 노래를 들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빅토르 최의 노래를 더 들으며 세 대의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났다, 휴지로 코를 풀었더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생각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아직 기타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디오를 틀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라디오에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음악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낮에 푹 잤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심심해서 화분에 물을 주고 커피를 한 잔 타 먹었다, 담배를 또 한 대 피웠다, 그래도 갈증이 나서 커피를 한 잔 더 먹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나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벌써 잠들어 버린 걸까,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중국 악기를 쳐다보았다, 악기가 마오 쩌뚱, 기울어져 있었다, 활을 들고 연주하면 띵 샤오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어항을 열어 거북이 밥을 주고 나서 로리 콜윈이라는 여성 작가의「情婦」라는 단편을 읽었다, 또 담배가 피우고 싶어져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다, 또 재채기가 났다, 휴지로 다시 코를 풀었다, 여자 아나운서는 여전히 졸리지 않은 목소리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시간엔 그녀의 음성이 음악 같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아니 내리지 않아도 나는 이 시간엔 그렇게 쓰고 싶다, 그러나 창문을 열어보니 진짜로 눈이 내린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새벽을 고요히 덮어가는 눈발, 나는 강원도의 힘을 느낀다, 강원도의 힘은 저 눈발로부터 온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뒤덮어버리는 저 무지하고 순수한 反動으로부터, 나는 내가 강원도 출신이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지금 강원도에 있지 못하므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강, 원, 도, 라고 속으로 발음해 본다, 언젠가 돌아가고 싶다 그 품으로,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죽어서 또 다른 부활을 꿈꾸는 영혼의 대지를 감싸며 눈은 사랑의 힘으로 밤새 내린다, 그러나 아직 나는 기타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4. 그리고 그 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새벽의 술잔을 깨며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기타를 침묵케 함은 헛된 일, 기타를 침묵시킴은 불가능한 일, 지상에 낮게 깔린 물결이 울고, 눈 쌓인 산정에서 겨울바람이 울 듯 단조롭게 기타가 울고 있네, 기타를 침묵시킴은 불가능한 일, 멀리 있는 사물을 위하여 기타는 운다네, 뜨거운 남쪽 나라 모래는 하얀 동백 꽃잎을 구하네, 표적 없는 화살인 양, 아침 없는 오후에 나뭇가지 위에서 제일 먼저 죽어간 새를, 기타는 울어주네, 아, 기타여! 다섯 개의 검으로 베어진 심장이여!(울고 있는)


  5. 눈 내린 아침에

  -뭐처럼 생긴 것 같아?
  -머리에 볶음밥을 올려 놓은 것 같아
  눈이 내린 아침, 로르카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어린 아들이 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어두운 숲의 저편에서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려 새들의 날개가 젖어갈 때 내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다섯 개의 검으로 베어진 심장이 울어 身熱처럼 밤새 내가 듣던 음악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가르시아 로르카의 악기, 밤새 내가 듣던 음악보다 더 고요한 음악, 이런 것들, 저런 것들, 둥둥둥 울리는 추억의 기타 등등을 위해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새벽 세 시의 사막과 네 시의 적막 그리고 다섯 시의 눈발을 지나 다다른 이 환한 아침에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내 기침 소리 덮어버리며 내리는 무모한 폭설을 위해, 그 폭설을 바라보던 간밤의 아득한 신열을 위해
  나는 나의 기타를 연주하네,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라는 시를 이제 막 쓰려고 하는 나를 위해, 눈 내린 이 아침에

  나는 기타를 연주하네,
  그리고 그 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 스페인의 시인(1898-1936).「2. 지나간 후에」와「4. 그리고 그후에」는 로르카의「부정한 유부녀」와「기타」라는 시를 변형하여, 인용하였다.

  -- 2005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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