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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수난사: 울지 마라 독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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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수난사: 울지 마라 독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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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바라본 독도 풍경.

안용복(安龍福)은 조선 숙종(肅宗) 때 사람으로, 강원도의 평범한 어부였다. 어느 날(1693년 봄) 그는 어부 40여 명과 함께 뭍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당시 울릉도는 조선의 공도정책으로 비워두었다)로 고기잡이를 나섰다가 왜국의 어부들을 만나 싸우던 중 붙잡혀 지금의 도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군주에게 울릉도는 우리 땅이니 왜 어민의 출입을 금할 것과 이런 내용을 서찰로 써줄 것을 요구하여 결국 서계를 받아들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대마도에 이르러 대마도주는 이 서계를 빼앗고 오히려 안용복을 왜 영토인 죽도의 침입자라며 위조한 서계를 부산으로 보냈다. 당시 죽도는 왜국에서 울릉도를 부르던 지명이었으며, 독도는 송도라 부르고 있었다.

왜국의 울릉도 영유권 트집으로 조선 어민의 울릉도 어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던 이 때 귀국한 안용복은 다시 여러 척의 어선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떠났다. 1696년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왜 어선들이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안용복은 같이 온 어선들과 협력하여 왜 어선을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왜 어부들은 “우리는 송도 사람들인데, 우연히 여기까지 왔다”고 변명하며 달아났다. 그러나 안용복은 “너희가 말하는 송도는 우산도로써 거기 또한 우리 땅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추격하여 이튿날 지금의 독도에 머물고 있던 왜인들을 모두 몰아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안용복은 재차 왜국까지 건너가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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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독립문 바위.

그러나 당시 강원도감인 심평은 안용복 일행을 범월죄, 즉 왜국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로 오히려 사형을 선고했다. 조정이 못하는 일을 일개 어부가 나서서 해내었으나, 외교적 분쟁을 꺼려한 조정이 오히려 안용복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다행히 이듬해 2월 왜국에서 죽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서계가 도착하여 안용복은 사형은 면했으나, 섬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유배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오래 전부터 우리 땅이기는 했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왜 어선의 출몰이 빈번한 곳이었다. 안용복은 몸을 던져 이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형벌뿐이었다.

독도(獨島)는 옛날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독섬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던 이름은 독섬이었다. 조선 후기 울릉도 개척시대(고종) 이후로 독도는 사람들에게 독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처음 돌섬에서 돍섬-독섬으로의 과정을 거친 이름인 것이다. 독도는 이 독섬을 한자로 옮겨적는 과정에서 돌을 뜻하는 ‘독’의 음과 섬의 뜻을 빌려 독도가 되었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 우산국이었던 울릉도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처음으로 우리의 고유영토가 되었다. 신라에 편입되기 이전까지 울릉도는 망망대해의 해상 소왕국으로서 나라 이름을 우산국이라 하였는데, 정작 우산도라는 이름은 본섬인 울릉도(무릉도)가 아닌 독도에 붙은 이름이었다. 이는 해상왕국이었던 우산국에서 독도가 해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과 지도에도 우산국을 표기할 때 항상 독도를 빠뜨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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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순찰중인 안개 속의 경비선.

고려시대에 이르러 울릉도는 여진족과 왜구의 잦은 침략(1018~1019년)으로 여러 번 피해를 입었으며, 조정에서는 뭍으로 도망나온 우산국 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살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울릉도는 조선 태종 시대에 이르러 빈번한 왜구의 침략으로 주민들이 피해를 입자 공도정책에 의해 주민들을 뭍으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약 357년 정도 섬을 비워두었다. 그러나 고종 때인 1882년 다시 울릉도 개척령에 따라 주민을 이주시켰는데, 이 때 울릉도와 독도에는 공도정책을 틈타 왜국의 어민들이 일부 들어와 살면서 주인 행세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감찰사를 울릉도로 보내 76명의 왜국 어민을 적발하여 문초했다고 한다.

독도의 가장 큰 수난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 일어났다. 일본은 러시아 해군을 정찰한다는 이유로 독도를 오키도사 관할로 강제 편입시켰다. 이는 사실 군사적 목적 외에도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 강치(물범, 울릉도 사람들은 이를 가제라 불렀다)를 보다 안정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로비를 벌인 결과물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런 사실을 1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으며, 사실상 일제의 강제병합 직전이었던 우리 조정으로서는 어떤 외교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독도는 다시 우리 땅이 되었지만, 독도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48년 6월 30일 미군은 독도를 폭격 목표물로 삼아 B29 폭격기들이 독도에 폭탄을 퍼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독도 주변에서 조업중이던 우리 어부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폭격을 당해 사상자가 속출했고, 파선한 어선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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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인근 바다에서 조업중인 어선.

당시만 해도 독도에는 1천 두가 넘는 강치떼가 몰려올 정도로 강치 호황이었고, 고기와 미역이 많아서 독도에는 많은 어부와 똑딱선들이 독도 인근에 머물러 있었다. 폭격을 감행한 미군이 이를 보지 못했을 리 없건만, 미군은 대수롭지않게 이 곳에 폭탄세례를 퍼부어댄 것이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울릉도 주민의 독도에 대한 사랑은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 창설로 이어졌다. 당시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33명은 약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서 일본과 수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끝까지 독도를 사수하였다. 일본은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를 침략하는 만행을 수시로 저질렀는데, 이 때마다 독도를 사수한 영웅들이 바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였다.

독도에 처음으로 입도해 삶을 꾸린 주민은 최종덕 씨다. 그는 1965년부터 독도를 드나들며 전복과 해삼, 미역 등을 채취하며 살다가 1981년 정식으로 호적을 독도로 옮겨 독도 1호 주민이 되었다. 현재 그는 서도에 거처(어민 대피소)를 마련해놓고 있으며, 동도에는 독도경비대(40여 명)가 머물고 있다. 독도(799-805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는 뭍에서 약 217킬로미터, 울릉도에서 약 87킬로미터 떨어진 절해고도의 화산섬이다. 우리나라 동쪽 끝에 위치한 독도는 두 개의 큰 섬인 동도와 서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32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적으로 따지면 약 5만 5천여 평에 이른다. 경비대 건물을 비롯해 접안시설과 등대(50년이 넘었으며 등대지기 3명이 2년마다 순환근무한다) 등의 주요 시설은 모두 동도에 있으며, 부두에서 경비대 건물까지는 계단이 설치돼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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