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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1 산골에 혼자 사는 선글라스 노인 9

산골에 혼자 사는 선글라스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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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메 흙집에 혼자 사는 선글라스 노인


윗면옥치 흙집에 혼자 사는 서종원 할아버지가 방금 마실 다녀와 설피에 잔뜩 묻은 눈을 털어내고 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관계로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눈이 너무 마이 와 거긴 못 들어가요.” 양양 어성전에서 만난 구멍가게 아저씨는 잔돈을 거슬러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차안에서 금방 사온 빵과 우유로 대충 늦은 점심을 때우고, 비상식량으로 산 초코파이 한 상자를 옆자리에 애인처럼 앉힌 채 면옥치 큰 고개를 넘는다. 어제 내린 40cm의 눈을 대충대충 치워놓은 고갯길. 그러나 제설작업을 해놓은 비탈길은 되레 매끄럽게 닦아놓은 스키장과 같아서 고개를 넘어가는 내 중고 지프는 거의 진땀을 흘릴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가드레일도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순식간에 추락할 판이었다.



선글라스 노인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키우는 강아지. 


아슬아슬하게 내가 고개를 넘어 면옥치에 도착했을 때는 등줄기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옷이 다 축축해졌다. 휘유우~.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해질 무렵에야 도착한 아랫면옥치. 남대천의 본류가 되는 면옥치천이 바로 이 골짜기를 따라가는 윗면옥치에서 시작된다. 기어이 나는 기어를 4륜에 놓고 윗면옥치를 향해 기어가는데, 늙은 차의 바퀴가 연신 길 위에서 맥없이 미끄러졌다. “거는 가지 말아요. 눈이 이래 왔는데.”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윗면옥치 서재등 고개를 가리키며 손을 내저었다. 아주머니 말을 듣지 않아서일까. 급기야 눈길에서 나는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윗면옥치에 다 온 듯해 잠시 방심한 것이 어어어, 하면서 미끄러지더니 길가의 소나무를 들이받은 것이다.



선글라스 노인이 사는 윗면옥치 흙집이 눈에 폭 파묻혀 있다. 나가 사는 아들도 오랜만에 집을 찾아왔다.


소나무를 들이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곡으로 미끄러졌을 것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길이었으니 망정이지, 길이 좋았으면 오히려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차를 한쪽에 밀쳐놓고, 걸어서 눈길을 걸어가는데 흙집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개울가의 길을 마당삼아 자리한 흙집. 무작정 나는 흙집 마당으로 들어서 주인장을 불러본다. 부엌에서 선글라스를 낀 노인(서종원, 68)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해도 넘어간 마당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니! “할아버지 다저녁에 선글라스는 왜 끼고 계세요?” 알고보니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다 흙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앞을 못보는 그가 설피를 신고 마실을 나서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할아버지가 멋을 부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는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고, 혼자 밥을 하고, 혼자 잠을 잔 지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로웠던지 그의 집에는 네 마리의 개와 이제 막 장난을 치기 시작한 배냇강아지가 여덟 마리나 됐다. 앞을 볼 수 없으면서도 무려 열두 마리의 식구를 그가 먹여살리고 있었다. 지은 지 50년이 넘었다는 흙집. 봉당에는 방금 어디라도 다녀온 듯한 설피가 놓여 있었다. 끈은 다 헤지고 낡았다.



 수북히 눈이 쌓인 면옥치 계곡 풍경.


“요새도 이 설피를 신나요?” “그럼요. 여서는 이 살피 없으면 댕기덜 못해요. 여긴 눈이 워낙에 마이 오는 데라서. 한번 눈이 오면 이래 무릎까지 보통으루 채이요. 그러니 이 살피가 절대적으루다 필요해요.” 오늘도 낮에는 설피를 신고 마실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정말로 설피가 필요해서 이렇게 절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나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그는 앞을 못보면서도 당귀며 감자, 옥수수 농사까지 짓는다고 한다. “근데 올핸 수해가 나서 다 떠니리가구 아무것도 안남았어요. 아들이 가끔 들어와 농사도 거들고, 낭구도 해주고 그러긴 해요. 올핸 면에서 쌀 몇 푸대 주는 거루다 견디야지 뭐. 벨수 있나.” 불현듯 나는 차안에 비상식량으로 싣고 온 초코파이가 생각났다. 하여 그의 허락도 없이 그것을 가져다 슬쩍 방안에 밀어넣었다. 날은 벌써 캄캄해지고, 온 길을 되돌아가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랫면옥치에서 만난 눈밭 위의 기울어가는 뒷간채.


이튿날 어성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윗면옥치를 찾았다. 어제 들렀던 흙집에 당도해보니 가끔씩 들어와 농사를 도와준다던 아들이 와 있었다. 내 목소리가 기억이 났는지 선글라스를 쓴 노인은 괜한 짓을 했다고 나를 나무란다. 이렇게 되면 겨우 초코파이 한 상자 인심을 쓰고 공연히 생색을 낸 꼴이다. 어쨌든 내가 마을 구경을 하겠다고 나서자 앞을 못보는 그도 설피를 챙겨 신고 함께 마실을 나선다. 마을에 관한한 나같은 눈뜬 장님보다야 앞 못보는 그가 훨씬 훤하게 알고 있다. 보아하니 봉당에 있던 지게 작대기로 그냥 지팡이를 삼았다. 여덟 마리의 강아지도 줄레줄레 노인을 따라나선다. 선글라스를 쓴 설피 노인과 여덟 마리의 강아지.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나는 이미 마을 구경을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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