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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30 역전고양이 묘생역전 25

역전고양이 묘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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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고양이 묘생역전


 


역전에 산다고 역전고양이다. 녀석들을 처음 만난 건 장마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몇 며칠 비가 내려 산책을 나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날이 개어 아내와 함께 개운한 마음으로 월야 산책에 나섰다. 역전을 지나쳐 50미터쯤 보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자동차 불빛 속을 횡단하는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자동차를 피해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고등어무늬가 선명한 녀석이었다. 아마도 벌레나 개구리를 잡아먹으러 숲으로 들어간 듯했다. 마침 가져온 사료가 있어서 숲 입구에 약간 뿌려주자 녀석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와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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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밤에도 우리는 녀석을 보았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다섯 마리였고, 모두 아기고양이였다. 두 마리는 담장 위에 엎드려 있었고, 나머지는 보도에 나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녀석들은 순식간에 밭 건너 헛간으로 줄행랑을 쳤다. 아무래도 저 헛간이 거처인 듯했다. 헛간은 본채가 있는 마당과 통하고 있었지만, 밭 언저리 쪽으로 불쑥 튀어 나와 있었다. 나는 헛간에서 빤히 내다보이는 밭고랑 옥수수 대궁 옆에 사료를 조금 놓아두었다. 이후로 밤마다 녀석들을 이곳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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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낮에 보니 이상하게 생겼어요."

어떤 날은 고추밭 고랑에 앉아 있었고, 어떤 날은 본채 마당과 장독대를 돌아다녔다. 보도에 나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하면, 차 밑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 때도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나는 녀석들에게 한밤중 공양을 바쳤다. 정성이 갸륵했을까, 어느 날 부턴가 녀석들은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헛간에 있다가도 달려나왔고, 차 밑에 있다가도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녀석들은 경계심을 조금씩 풀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늘 어두운 밤이거나 달빛 아래였으므로 나는 녀석들의 모습을 확연히 살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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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씩씩하게 명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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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러면 어떤가. 오히려 녀석들은 어두워서 더 빛나 보였다. 달빛 속에 앉아 있을 때면 이 녀석들이야말로 달빛 요정처럼 보였다. 달빛 속에 앉아 있는 다섯 마리의 요정들. 요정 치고는 너무 겁이 많고, 털이 많긴 했지만……. 저녁이면 지구별에 살짝 내려왔다가 아침이면 고양이별로 돌아가 버리는, 그런 동화 속의 주인공들.

“근데 무슨 요정이 귀뚜라미를 잡아 먹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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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익어가고, 여름은 물러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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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멋진 상상이 멋진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종종 아기고양이 남매들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사냥을 하곤 했다. 주로 녀석들의 사냥감은 귀뚜라미와 매미였다. 밤이면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보도에는 수많은 곤충이 몰려들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이 귀뚜라미였고, 메뚜기와 매미도 흔했다. 사마귀와 풍뎅이도 있었고, 땅강아지와 사슴벌레를 만난 적도 있다. 사냥에 나서는 아기고양이들은 가로등 아래서 가만히 기다린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폴짝 뛰어오르면, 단 한번에 고양이는 그것을 낚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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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아저씨 땜에 배 곯지 않고 여름을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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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냥이가 가로등 아래서 곤충사냥을 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한번은 굴다리 앞에서 이따금 만나는 고등어 녀석이 가로등 아래 조각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고양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무언가 내려앉자마자 날렵한 낚아채기로 그것을 사냥했다. 녀석들의 사냥은 거의 낚시에 가까웠다. 무언가 떨어지거나 튀어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단번에 낚아채 버리므로. 사실 요정보다도 나는 이런 낚시꾼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고양이가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현실적인 녀석들의 치열한 생존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녀석들을 응원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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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했으면, 이제 사료를 주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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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성인 역전고양이를 낮에도 만난 건 얼마 전이다. 이웃마을에 사료를 배달하고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역전고양이네 영역을 잠시 들렀는데, 어떻게 알고 녀석들이 헛간을 빠져나와 고추밭 이랑에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날은 마침 꼬리가 짧은 어미고양이도 함께 있었다. 밤에만 보던 녀석들을 낮에 보니 낯설었다. 녀석들도 그건 피차일반이라는 듯 밤보다 경계심이 더했다. 밭가에 사료를 놓아두고 10미터쯤 비켜서 있는데도 녀석들은 쉽게 먹이를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기어이 내가 멀찍이 자리를 피하자 그제서야 녀석들은 동그랗게 모여앉아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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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건넨 사료를 먹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역전고양이 꼬리 짧은 고등어 어미.

어느 날 우연히 산책길에 만난 고양이. 우연이 인연이 된 고양이. 가로등 아래서 귀뚜라미와 매미를 사냥하던 고양이. 고개만 돌리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고양이. 역전 50미터 앞에서 묘생역전한 고양이. 이후 여러 차례 더 역전고양이를 낮에 만났다. 낮에 만나는 것이 조금 익숙해지자 역전고양이 중 한 마리는 차도까지 내려와 발라당을 선보였다. 맨 처음 만났던 고등어 녀석이었다. 마치 그 모습은 역전고양이를 대표해 고마운 인사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발라당을 하는 고양이 너머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달려가고, 여름이 가고 있었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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