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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5 봄은 고양이의 계절 26

봄은 고양이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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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계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지는 않더라도

봄은 봄이어서

고양이의 면면도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대모네 식구와 꼬미는 한겨울에 쌓였던 눈이 녹고

논자락 짚북새기가 봄볕에 말라 북슬북슬해지자

급식 대기시간과 급식 후 휴식시간을 주로 짚북새기 위에서 보내곤 한다.

 

 "아저씨 여기 따끈한 커피 한잔 배달이요!" "난 핫초코!" "난 카라멜 마끼아또!" "난 그냥 구수한 숭늉이나 좀..."

 

이곳이야말로 푹신하고 따뜻해서 일광욕을 하기에도

낮잠을 자기에도 그만이다.

사실 지난 초겨울만 해도 논자락에는 짚단이 여기저기 방치돼 있어서

대모네 식구들은 짚단 틈바구니로 들어가

찬바람을 막고 추위를 견디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턴가 짚단이 사라져 논자락에는 짚북새기만 남았다.

 

 "엄마 이제 아프지 마! 날도 풀렸으니까 얼른 나아야 돼?"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대모네 식구들은

이것을 무척이나 애용하사,

누가 봐도 저곳엔 고양이가 앉았다 갔겠구나, 하는 흔적을 남기곤 했다.

며칠 전 한 차례 봄비가 내리고 살짝 황사가 뒤덮은 날에도

녀석들은 어김없이 짚북새기 위에서

가는 봄날을 꾸벅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파파라치에요? 이런 건 좀..."

 

확실히 봄은 고양이의 계절이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녀석들의 몸도 봄볕이 좋은 날이면

나른나른 사지가 늘어진다.

그러다가도 무슨 장난기가 발동하면 무슨 유치원생들처럼 생기가 넘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오두방정이다.

봄이 되면서 나는 대모네 급식장소를 약간 조정했다.

겨우내 논바닥에 부어주던 것을

지금은 논두렁 배수구 앞 혹은 개울가로 옮겼다.

 

 재미와 꼬미의 묘생 첫번째로 맞는 봄!

 

아무래도 얼마 뒤면 논자락에는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댈 게 뻔하다.

해서 미리 급식장소를 논배미 바깥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새로 옮긴 논두렁 배수구 앞도 장차 논에 물이 들어차면

이곳으로 물이 흘러넘칠 게 분명하다.

때문에 배수구 앞은 임시장소로 사용하는 중이다.

 

"고양이별에 계신 조상묘님들!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조만간 급식장소를 개울가로 옮길 예정인데,

여기에는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녀석들은 배수구 앞에서 밥을 먹고 나면 꼭 배수구를 통과해

개울로 내려가곤 한다.

물을 마시고 쉬기 위함이다.

 

 "아저씨 이 차 야옹리 가요? 잘못 탔나?"

 

논에 있는 짚북새기 위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있지만,

요즘에는 점점 더 개울가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도로벽이 2미터는 되는 바람에 길에서도 개울은 보이지 않고

천연 화장실인 모래밭까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인데다

식수문제와 화장실 문제까지 해결되는 곳이 개울인 것이다.

 

 "울 엄마도 옛날에 부뚜막 참 좋아했다 들었어요. 참말인가요, 아저씨?"

 

다만 개울에서는 낮잠을 잘만한 곳이 없어

녀석들은 한참 개울에서 놀다가

잠이 오기 시작하면

다시 배수구를 통과해 논두렁으로 올라오곤 한다.

논두렁 풀밭 또한 논배미 짚북새기만큼이나 푹신하고 따뜻해서 자주 풀밭에서도 낮잠을 잔다.

 최근 들어 녀석들은 살던 둥지도 옮긴 듯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프니까 고양이다!"

 

겨우내 녀석들은 옛 축사가 있던 텃밭가에 둥지를 틀고 있었으나,

얼마 전부터 농사가 시작되면서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자 어디론가 둥지를 옮겨버렸다.

그곳이 어딘지는 나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지난 초겨울부터 대모는 목에 난 상처와 싸우고 있다.

누군가 해코지를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고양이와 싸우다 목을 물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데... 왜 아직 아무 소식이 없죠? 거참 이상하네..."

 

목 부위에 털이 뜯겨져 나가 맨살이 다 드러났고,

드러난 맨살에서는 피가 흘러서 딱지가 앉았다.

 그동안 나는 서너 번에 걸쳐 라이신을 섞은 사료를 건넨 적이 있지만,

녀석의 상처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상태가 호전되었다가도

다시 도지곤 했다.

 

봄날은 간다. 낮잠과 함께, 그루밍과 함께... 

 

날이 추워서 상처가 잘 낫지 않는 것인지,

감염 부위가 번져서 자꾸 상처가 커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상처를 지니고도 대모는

겨울을 훌륭하게 건너왔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었으니 저 상처도 나을 수 있을까.

녀석들의 아픈 묘생에도 꽃이 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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