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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9 조도에서 멸치배를 타다 16

조도에서 멸치배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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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에서 멸치배를 타다


예부터 진도군 조도는 멸치어장에 인접해 있어 멸치 섬이나 다름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상 조도의 웬만한 포구마을은 모두 멸치마을이다. 그 중에서도 알아주는 멸치마을을 꼽으라면 하조도에서는 곤우마을, 상조도에서는 맹성마을이 유명하다. 때마침 내가 곤우마을에 도착했을 때 포구에서는 멸치 삶기와 말리기가 한창이었다.

남편은 멸치배에서 바구니마다 그득한 멸치를 아궁이로 옮기고, 아내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다란 가마솥에 멸치를 삶아낸다. 이 때 딱가래(채반)로 떠낸 멸치를 볕 좋은 양지에 널어말리는 일은 시어머니가 맡았다. 멸치철마다 하는 일이니 옮기고, 삶고, 널어말리는 이들의 분업은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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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배를 탄 어부가 그물로 막 잡아올린 멸치를 바구니로 옮기고 있다.

멸치를 삶을 때는 그냥 삶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때 나오는 찌꺼기들을 수시로 뜰채같은 쪽바지로 건져내야 하며, 너무 푹 삶아도, 너무 덜 삶아도 안되므로 불 조절도 맞춤하게 해야만 한다. 뒤늦게 도착한 하조도의 맹성마을에서도 멸치 삶기가 한창이었다. 맹성마을(60여 가구)은 옛날부터 진도 일대에서 으뜸으로 치던 멸치마을이다. 마을의 뒷개포구 주변에 멸치 아궁이가 지금도 수두룩하다. 멸치 아궁이란 멸치를 삶아내기 위해 포구 주변에 설치한 것으로, 아궁이에는 저마다 커다란 무쇠솥이나 양은솥을 내걸고, 뒤편에는 한결같이 굴뚝을 높이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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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들은 멸치배의 뒷꽁무니를 내내 따라다니며 잡고기 동냥을 한다.

뒷개포구에서 만난 한영규 씨(59)는 삶은 멸치를 담아다 포구 공터에 너느라 분주했다. 딱가래에 생멸치를 담아 가마솥에 푹 담갔다 꺼내면 멸치는 금세 뽀얗게 삶아진다. 이렇게 갓 삶아낸 멸치는 김이 모락모락 날 때 그냥 입에 넣어도 맛깔진 바다맛이 난다. 볕이 좋은 날이면 삶아낸 멸치는 반나절도 안가 다 마른다. 생멸치를 그냥 말리면 며칠이 걸려야 건멸치가 되고, 비라도 오면 마르기도 전에 상하고 마는 게 멸치다. 멸치를 삶아서 말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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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잡기를 끝내고 포구로 돌아가는 멸치배.

한영규 씨에 따르면 맹성마을 사람들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멸치를 잡는다. 뒷개포구에는 모두 15척의 멸치잡이배가 있는데, 멸치철이 되면 멸치어부는 하루종일 멸치작업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근 3년 넘게 해파리땜시 멸치 흉어기를 겪었소. 이 해파리란 놈은 멸치를 잡아먹능게 아니라 바다에 쳐놓은 정치망(그물)을 사정없이 찢어버리요. 그러니 어떤 피해보다 해파리 피해가 큰 벱이요.” 멸치 삶기가 끝나자 그는 정치망을 걷으러 가야 한다며 배를 띄웠다. 맘씨 좋은 그가 멸치 잡는 구경을 할 거면 같이 가도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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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바다에서 잡아올린 싱싱한 멸치.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멸치배에 올라탔다. 소형어선인지라 멸치배는 잠깐 가는 중에도 억센 파도와 너울에 가랑잎처럼 휘청거렸다. 한참 앞바다로 나선 멸치배는 갑자기 시동을 끄더니 멸치 그물을 가리켰다. 파도가 배를 때릴 때마다 비오듯 바닷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멸치배의 선장과 선원은 멸치 그물을 걷어올려 함지박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빨간 고무 함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빛 멸치떼로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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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도 곤우마을 포구에서 멸치 나르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생각없이 멸치 잡는 풍경을 찍던 내 카메라가 정통으로 파도 세례를 받은 것이다. 결국 포구로 돌아갈 때까지 서너 차례 더 카메라는 바닷물을 뒤집어썼다. 멸치배를 탄 대가는 혹독해서 나중에 카메라와 렌즈는 수리비가 적지 않게 들어갔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물을 다 내리고 배가 포구로 향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포구에 있던 갈매기떼가 일제히 멸치배로 모여든다. 이제부터 멸치가 아닌 잡고기를 바다에 던질 순간이라는 것을 녀석들은 영리하게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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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잡아온 멸치는 곧바로 멸치 아궁이에 삶아내 포구에 널어말린다.

하여 뒷개포구의 갈매기들은 평소에는 포구를 어슬렁거리다가 앞바다의 멸치배가 그물을 내리는가 싶으면 득달같이 몰려오곤 한다. 몰려온 갈매기는 멸치배가 포구에 닿을 때까지 마치 퍼레이드를 벌이듯 줄곧 꽁무니를 따라온다. 보통 조도에서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멸치를 잡는다. 액젓용 멸치는 봄과 여름에, 건조용 멸치는 봄부터 가을까지, 겨울을 빼고는 내내 잡는다. 과거 조도가 멸치 풍어로 잘 나갈 때만 해도 멸치철인 여름과 가을이면 뭍에 나간 식구들의 손을 빌어야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제 그런 풍어는 기대하기 어렵다. 해파리 피해도 그렇거니와 먼바다부터 잡고기를 싹쓸이하는 이른바 ‘고대구리’ 어업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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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도 맹성마을 뒷개포구에서 만난 멸치 널어 말리는 풍경.

멸치배에서 내리자 카메라도 옷도 몸도 모두 바닷물을 뒤집어써 비 맞은 생쥐꼴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멸치를 삶는 맹성마을의 멸치 아궁이 앞에 앉아 옷과 몸을 말리고, 한번 더 멸치를 삶고 포구에 내다 말리는 풍경을 구경한다. 삶은 멸치는 포구의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맹성마을 사람들에게 ‘삶은 멸치’는 곧 삶이었고, 생활의 일부였다. 저녁이 되도록 멸치 아궁이의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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