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에서 만난 신들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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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 만난 신들의 언덕




아주 상투적으로 말해 티베트는 세계의 지붕이며, 영혼의 나라이고, 신들의 언덕이다. 티베트에서는 말 많은 자는 고달프고, 날뛰는 자는 숨이 차다. 순례자가 아닌 여행자로서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티베트는 끊임없이 내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의 언어여서 감당할 수가 없지만, 그로 인해 나는 더욱 경건해져갔다.  바깥에서 온 여행자 눈에는 때로 티베트의 시간이 느리고 답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달려간다고 해서 하루가 더 빠르게 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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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008미터 둥다라 산 가는 길의 언덕에서 만난 타르쵸.

애당초 이들은 바깥 세계와 경쟁할 마음조차 없어 보인다. 더더욱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욕심도 없어 보인다. 만일 현대 문명의 혜택과 소비를 누리지 못한다고 불행하거나 비참하다고 말한다면, 이른바 선진국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야 옳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TV와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와 비행기, 전기와 도시가스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발전과 행복은 비례하지도 않으며, 물질적 번영이 복지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1. 훙라설산의 고요한 언덕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신에게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자연스럽게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내 앞에는 온통 신들의 산, 신들의 언덕, 신들의 계곡, 신들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하늘에 가까워졌고, 특유의 티베트 하늘 빛깔이 선명했다. 너무 파래서 간간 군청색이 감도는 하늘. 그 시린 하늘에 아무렇게나 뜬 구름이 유난히 하얗게 빛난다. 두루뭉실한 산마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라색 잔꽃들이 흐드러졌다. 유일하게 인공적인 것이라고는 내가 타고 있는 바퀴 달린 속도기계뿐이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되는 길을 봉고차는 부리나케 꽁무니를 뺀다. 뒤를 돌아보면 산자락 에움길이 흙먼지로 자욱하다. 길 위에서 차는 덜컹거리고, 탈탈거리고,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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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라설산 가는 길의 언덕 위에서 바라본 란창강 풍경과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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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은 좋고, 바람은 시원하다. 훙라(紅拉)설산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고도는 조금씩 높아져간다. 길은 차근차근 고도를 높여 어느 새 가파른 산등성이를 다 올라왔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눈 덮인 설산 봉우리가 몇 겹의 산자락 너머로 희미하게 펼쳐진다. 제법 덩치가 큰 훙라설산(4470m)을 둘러싼 설봉들이다. 차는 훙라설산의 고갯마루를 겨우겨우 올라선 뒤에야 한숨을 돌린다. 힘겹게 올라온 훙라산 고갯마루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능선의 바다가 실로 장엄하기만 하다. 그 장엄한 풍경을 배경으로 어김없이 타르쵸가 휘날린다. 타르쵸는 사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한 곳에 어김없이 휘날리고 있다. 타르쵸의 깃발은 더러 바람과 세월에 찢겨지고 헤져 쓸모를 다하지만, 고개를 넘을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깃발을 가져다 건다. 그러므로 타르쵸는 늘 그 자리에서 수백년 수천년을 견디고도 여전히 건재하고, 여전히 신성하다.

2. 해발 5008m 둥다라 가는 길에 펼쳐진 '신들의 정원'

샹그리라에서부터 차마고도를 따라 건설된 214번 국도는 티베트의 망캄을 지나면서 318번 국도에게 라싸행 임무를 넘겨준다. 길도 한결 좋아져 모처럼 아스팔트길이 푸른 골짜기를 향해 뻗어 있다. 덜컹거리던 차가 잠잠해지니 어쩐지 엉덩이가 허전하다. 망캄을 벗어난 길은 밋밋하고 펑퍼짐한 고개를 하나 넘는다. 나무는 드물어서 고갯마루가 천연한 초원의 언덕이고 꽃밭이다. 하지만 만만해 보이는 이 언덕도 해발 4000m가 훨씬 넘는 곳인데, 고갯마루에는 어김없이 타르쵸가 날리고 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라체(돌을 쌓아 만든 탑)가 쌓여 있고, 타르쵸가 날리는 풍경이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고개마다 그 감흥은 색다르다. 타르쵸가 날리는 언덕에서 무심하게 풀을 뜯는 양떼들. 젊은 양몰이꾼은 활 대신 이제는 엽총을 등에 매고 어슬렁어슬렁 언덕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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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이라 할만한 둥다라 산 가는 길의 꽃 핀 언덕(위)과 언덕에서 바라본 궁궁을을한 길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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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000m 고개에 이르러 다시 길은 비포장으로 바뀌었다. 티베트에서 비포장길이란 말 그대로 포장할 수 없는 구간이란 뜻이고, 그만큼 난구간이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조공으로 가려면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해발 4000m 정도의 산이고, 다른 하나는 해발 5008m의 둥다라 산이다. 해발 5008m. 이제껏 지나온 산 중에 가장 높고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올라갈수록 길은 급경사 벼랑길의 연속이다. 오른쪽은 금세라도 사태가 날 것만 같은 절벽이고, 왼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겨우겨우 산 하나를 다 올라와 내려다보니 산 아래로 흐르는 란창강 줄기가 희미한 실오라기처럼 보인다. 산중에서의 날은 금세 어두워진다. 날이 저물자 덩치 큰 산그늘이 지나온 에움길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차는 어둠을 뚫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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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다라 산에서 내려다본 계곡과 벼랑길 풍경.

그리고 다시 나타난 오르막길. 조금 전에 넘은 산은 4000m의 언덕이었지만, 이제 넘어야 할 산은 5008m의 둥다라 산이다. 어두컴컴한 산중의 비탈길에서 이제 들리는 소리라고는 으악, 꺄악, 어어어, 어머나 하는 비명만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렇게 1시간이 지나자 공포의 비명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쿨쿨, 푸아, 드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똑같은 공포의 반복에 사람들은 둔감해졌고, 결국 계속되는 공포의 리듬이 오히려 사람들을 피곤한 잠속으로 이끈 것이다. 저녁 10시 30분. 천신만고 끝에 차는 둥다라산을 넘어가 둥다마을에 닿았다.

3. 아흔아홉 굽이 감마라 고개에서 만난 장엄한 풍경

길은 고도를 높여 해발 4618m의 감마라 고개를 넘는다. 타르쵸가 날리는 고갯마루에서 10분간 휴식. 여기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곧 후회막급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라싸까지의 노정에서 가장 심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굽잇길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감마라 굽잇길은 더러 여행자들에게도 알려져 영문책자나 안내서마다 굽이의 숫자가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어떤 책에는 일흔두 굽이라 하고, 어떤 책에는 아흔아홉 굽이라 소개해 놓았다. 어차피 몇 굽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굽이가 많은 길을 그냥 아흔아홉 굽이라 하였으니, 이 곳의 굽이도 아흔아홉 굽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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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흔아홉 굽이라고 불리는 감마라 고갯길과 고갯길을 내려가다 만난 산자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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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마라의 아흔아홉 굽이는 Z자를 수없이 겹쳐놓은 듯 고갯마루에서 산 아래 계곡까지 내내 굽이져 있다. 운전수는 한숨부터 내뱉고, 여행자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 옛날 차마고도의 마방도 한 무리의 말을 이끌고 이 고갯길을 궁궁을을(弓弓乙乙) 넘어갔으리라. 가도가도 까마득하고 아찔한 길이다. 처음에는 몇 굽이나 되나, 하고 세어보다 깜박 졸았는데, 깨어보니 여전히 휘청휘청한 굽잇길이다. 산 아래 자리한 팍쇼가 해발 2600m라고 하니 감마라 고갯마루에서 무려 2000m 고도를 굽이굽이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웬만한 도시와 마을이 해발 3000m 이상임을 감안하면, 티베트에서는 해발 2600m가 저지대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 꼭대기쯤이 티베트의 가장 밑바닥인 것이다.

4. 걸라설산이 보이는 안주라 언덕

팍쇼를 지나면 길은 차츰차츰 오르막길을 이룬다. 길 옆에는 여전히 칭커밭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유채밭이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녹색의 칭커밭과 샛노란 유채밭과 멀리 보이는 흰 설산과 푸른 하늘과 구름의 어울림. 자연의 빛깔은 어떤 식으로 어울리든 아름답기만 하다. 영문판 안내서에는 여기서부터 걸라설산(5768m)을 앞에 두고 달리게 된다, 고 설명해 놓았지만, 앞쪽으로 보이는 설산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어떤 것이 걸라설산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길이 점점 설산 쪽에 가까워지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풍경은 푸른 칭커밭에서 김을 매는 아낙과 뒤로 보이는 설산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티베트다운 풍경이 연이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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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라 언덕 가는 길에 만난 칭커밭 풍경.

이런 풍경을 만나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티베트를 왜 여행하는지가 의심스러울 것이므로, 자주 나는 차에서 내려 칭커밭과 설산을 구경하고, 김 매는 할머니와 들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김을 매던 할머니 한 분은 웬 이상한 녀석이 칭커밭을 돌아다니나, 하고 한참이나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한다. 밭에서 놀던 아이들도 일제히 멈춰 서서 사진 찍는 나를 구경한다. 아이들에게는 이 푸른 칭커밭과 뒤로 보이는 설산 언덕이 놀이터이고 쉼터이다. 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이 길이 아이들에게는 동화이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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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라 언덕에서 만난 만년설산(위)과 안주라 습지에 핀 '신의 꽃'(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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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차츰 고도를 높여온 길은 이제 해발 4618m의 안주라 언덕을 올라간다. 티베트에서는 안주라 언덕처럼 5000m 안팎에 이르는 언덕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뾰죽한 봉우리가 없고 두루뭉실하니 고도가 높아도 그냥 여기는 ‘언덕’인 것이다. 언덕에는 습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작은 빙하호수와 유빙도 만날 수 있다. 습지의 가장자리에는 분홍빛 ‘신의 꽃’도 드물게 피어 있다.

5. 남쵸가 보이는 언덕, 라겐라

담슝에서 남쵸로 넘어가자면 해발 5190m의 라겐라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라겐라 언덕은 멀리 남쵸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고원의 평야와 산자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남쵸로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가는 곳이다. 남쵸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라겐라에서는 언제나 칼바람이 분다. 초여름인데도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주변의 산자락은 하나같이 밋밋하고,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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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겐라 언덕에서 바라본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산자락 풍경.

아예 이 곳은 나무가 살 수 없는 생육환경이다. 때문에 산자락이며 고원의 들판은 온통 잔디를 깔아놓은 듯 푸른 초원이고, 높은 산봉우리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덮여 있다. 물론 해발 5100m가 넘는 인근의 산봉우리는 대부분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멀리 만년설이 보이고, 희미하게 호수가 보인다.
이렇게 높은 남쵸와 라겐라 주변에는 꽤 많은 유목민들이 흩어져 산다. 이들은 주로 야크와 염소떼를 데리고 초원을 떠돌아다니는데, 남쵸 주변의 풍부하고 드넓은 풀밭이 이들에겐 삶의 터전이다. 산 아래 담슝마을에서는 흙으로 지은 집이 대부분이지만, 이 곳은 유목민의 거처답게 야크 가죽으로 만든 천막집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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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양을 품에 안고 구걸에 나선 라겐라 언덕의 유목민 아이(위). 남쵸가 보이는 언덕에서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타르쵸(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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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혹독한 겨울이 오면 가축을 데리고 짐을 꾸려 좀더 낮은 지대로 내려간다. 라겐라 고개에는 동냥을 나온 유목민의 아들 딸들도 10여 명을 훌쩍 넘는다. 이 아이들은 양떼를 몰지도, 땔감용 야크 똥을 찾아헤매지도 않는다. 대신에 어린 양을 가슴에 안고 라겐라 고갯마루에 올라 구걸을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의 구걸이 제법 당당하고 집요하다.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이 곳에 내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들은 관광객들에게 모델을 자처하고, 그 대가로 손을 내민다. 사진 한 장에 1위안.

*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길::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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