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의 역사: 청결하면서 불결한

|

목욕의 역사: 청결한 동시에 불결한 역사

고대 그리스에서는 집안에 손님이 올 경우 시녀로 하여금 목욕 시중 드는 일을 시켰다. 손님이 옷을 벗고 욕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시녀가 따뜻한 목욕물을 그의 몸 위로 부어주었고, 손님이 몸을 다 씻고 나면 그에게 모직으로 된 목욕 수건을 건네주었다. 간혹 아주 귀한 손님일 경우 하녀가 아닌 딸들의 시중을 받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유물 중 화병화에서 종종 만나는, 목욕하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들은 창녀들을 그린 것인데, 혹여 그림 속에 남자가 등장한다면 그는 바로 매음굴에 와 있는 셈이다. 이처럼 목욕의 역사는 애당초 신체적 쾌락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그리스 시대의 것을 본떠 지어졌으나 규모면에서는 훨씬 장대했다. 로마의 대중목욕탕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제정 말기에 이르자 850여 개의 대중목욕탕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카라칼라, 아그리파, 네로 대중목욕탕은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가령 카라칼라 대중목욕탕은 부지 12만 4400평방미터에 2300명이 동시에 목욕할 수 있는 광대한 욕실을 완비하고 있었으며, 욕탕 외에도 도서실과 점포, 경기장 등을 고루 갖춘 거대한 사교장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오후 1시부터 해질 무렵까지만 열렸던 목욕탕이 카라칼라 목욕탕이 생기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동되었다. 이에 따라 방대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도관 공사 또한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로마의 식민지 폼페이에도 스타비아, 중앙대광장, 중앙목욕탕 등 세 군데의 커다란 목욕탕이 있었다. 세 건물 모두 중심부에는 온탕, 증기목욕실, 냉탕이 동서를 축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수영장, 천장은 온통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폼페이에 있던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목욕탕 운영주들은 해시계를 이용해 여자의 목욕시간과 남자의 목욕시간을 통제했다. 당시의 목욕탕은 즐거움과 건강을 위해 설립된 장소였다. 사람들은 하루의 상당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며, 근육을 풀고 피부를 매끈하게 다듬었다. 폼페이 사람들의 생활에 목욕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그리스 시대의 목욕이 냉수욕이었다면, 로마시대에는 온수욕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의 목욕탕은 휴식이나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수영과 사우나, 향유바르기, 체조와 같은 경기를 즐길 수도 있는 신명나는 오락장소였다. 특히 지체 높은 남녀는 욕탕 시중꾼들로부터 각종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음부 마사지’였다. 뿐만 아니라 목욕탕 안에서 사람들은 모자이크와 조각, 분수, 그림 등을 마음껏 감상할 수도 있었다. 로마시대 초기만 해도 풍기를 중시하여 남녀가 따로 입욕하였고, 낮에만 입욕을 허락하였으나, 말기에 이르자 남녀 혼탕이 된 것은 물론이고 밤중까지도 목욕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욕탕은 이제 음탕한 장소로 탈바꿈하였다. 미모의 창녀들이 탕에 들어가면 남자들은 외설스런 행동을 자제할 줄 몰랐으며, 마음껏 여자들의 몸을 감상하고 품평했다. 가정부인들마저도 남자들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예를 시켜 자신의 몸을 씻게 하였다.

남녀 혼욕의 역사

중세시대 기사들 또한 목욕할 때 여자들의 시중을 받았다. 에센바흐의 궁중 서사시 <파르치팔>에서 보면 주인공이 느긋하게 목욕탕에 들어앉아 있을 때, 시중을 드는 처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자들이 남자의 은밀한 곳을 볼 수 없도록 목욕물은 온통 장미꽃잎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당시 장미꽃잎을 물위에 촘촘하게 뿌린 것은 목욕예절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목욕물을 식지 않게 하는 실용적 구실도 했다고 한다. 훗날 프랑스 작가인 브르통은 장미탕이 여인의 음문을 상쾌하게 해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현대의 의사들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로즈메리유 등의 향유를 38도의 온탕에 첨가하면 보통 목욕할 때보다 7배나 음핵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중세 독일의 한 가요모음집 삽화에도 목욕통 속에 온통 꽃잎으로 뒤덮인 중년 가수와 그 옆에 시중 드는 한 처녀가 화환을 건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세에는 여자가 남자를 향해 화환을 내민다는 것은 노골적인 구애의 표현이었다.

13세기 들어 유럽에서는 개인 목욕탕이 생기기 시작했다. 1417년에는 개인주택의 온욕탕이 런던시에 의해 특별히 인가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개인 욕탕보다는 역시 대중 목욕탕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대중 목욕탕은 모든 북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1268년 파리 시의 욕탕 규정에는 남녀가 공간적으로 격리된 욕실을 사용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남자 탕객 중에 욕실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는 탕객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13세기 파리의 대중 목욕탕에서는 아침에서 점심 때까지는 여자가, 오후와 저녁에는 남자가 이용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375년 함부르크 시의 욕탕 규정에도 여자들은 평일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남자들은 해질녘까지 다시 밤까지는 여자가 묙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에는 중벌에 처한다고 욕탕 업주에게 경고했다. 한편 1451년 취리히 행정을 맡았던 성직자 헴메를린은 부부가 아닌 상대와 한 욕실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의 결혼지참금을 몰수하도록 하였으며, 여탕에 무단 침입한 남자는 사형을 시키도록 요구했다. 15세기 아비뇽의 욕탕도 비슷한 규정을 내걸었으며,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여탕에 강제로 침입한 남자는 체포, 처벌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당시 그와 같은 규정을 지키지 않는 목욕탕이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암암리에 남녀 혼욕이 이루어지는 목욕탕은 현대의 불법 목욕업소들이 그렇듯 규정을 무시하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의 무수한 회화와 목판화, 동판화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가령 악사가 한쪽에서 연주를 하고 한편에서는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들이 욕조에 들어앉아 만찬을 벌이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1470년경 부르고뉴의 한 장식화에도 남녀가 집단으로 벌거벗고, 한데 어울려 목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 대해 ‘사창욕탕’이라는 주장이 유력한데, 당시 창녀가 있는 욕탕은 부르고뉴뿐만 아니라 인접한 프랑스 도시들에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런 욕탕들은 유곽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매춘을 일삼는 창녀들을 공공연히 두고 있었다. 빈의 목욕탕도 이미 13세기부터 비밀 사창가라는 세평이 나 있던 터였다.

목욕탕, 음탕한 장소로 탈바꿈

간혹 건전한 목욕탕과 창녀를 둔 목욕탕이 한 건물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1448년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욕탕 업주들에게 건전한 목욕탕과 그렇지 못한 욕탕을 한 건물 안에 두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당시 창녀를 둔 욕탕은 종종 일반 사창가와의 경쟁관계로 마찰을 빚곤 했는데, 1477년 몽펠리에 있는 사창가 업주들은 시에 있는 두 군데의 ‘사창 욕탕’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두 욕탕의 창녀들이 이웃한 수도원으로 넘어들어가 수도사들에게 음란한 알몸을 보여주거나 음부를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녀를 둔 욕탕 중에는 아예 이름만 목욕탕일뿐 사창가 역할만 하는 곳도 있었다. 가령 아비뇽의 한 목욕탕은 단 한 개의 욕조 시설도 없이 침대만 잔뜩 갖춰놓고 목욕탕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영국에서 ‘증기’라는 의미의 스튜(stew)라는 말이 ‘사창’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띠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유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시대의 목욕탕은 간혹 개인이 운영하기도 했으나, 대개는 시정부에서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시가 점점 성장하면서 독신자의 수가 증가하고, 가족생활이 서서히 붕괴되자 목욕탕은 점점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들과 그런 여자들을 찾는 남자들의 휴게소로 변질되어 갔다. 아울러 창녀를 둔 욕탕과 음탕한 남녀 혼욕탕은 늘어나는 한편, 건전한 욕탕의 수효는 비례적으로 줄어들었다. 1483년경 스페인의 타푸르는 프랑스인의 남녀 혼욕을 보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세 독일의 목욕 풍습 또한 제정 말기의 로마처럼 남녀 혼탕이었다. 물론 입욕시 천으로 허리를 감게 했으나 물 속에서는 이 천이 가리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 남자는 섶나무 가지로 앞을 가리고 여자는 앞가리개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나왔다. 이미 14세기 초부터 뮌헨이나 레겐스부르크 등 남부지방에서는 결혼식의 피로연을 목욕탕에서 베풀었다고 한다.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음놓고 즐기는 주연으로서의 ‘목욕의 향연’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당시의 목욕탕이 남녀의 사교장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한편 1535년 브장송에서는 한 군데 욕탕만 제외하고 나머지 시내의 모든 욕탕에 공인된 창녀를 두어도 좋다는 허락을 공식적으로 내렸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13세기, 공식적으로 남녀 혼탕이 금지되던 시기에도 지하에 비밀통로를 만들어 공공연하게 사창가의 창녀들을 숨어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파리 시에는 사창 욕탕들이 무성하게 번져나갔다. 심지어 16세기 이르러 왕이었던 앙리4세마저 사창 욕탕을 드나들었다. 창녀가 있는 목욕탕에는 식탁 대신에 목욕통 위에 판자를 거쳐 술과 요리를 차려놓았으며, 그 위에서 도박도 즐겼다. 넓은 욕탕에는 마사지용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창녀 안마사나 때밀이는 안마를 해주고 때를 밀어주고 나서 손님을 유혹하여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갔다. 목욕탕이 이렇게 음탕한 장소로 탈바꿈하자 목욕탕 주인들은 점점 더 미모의 안마사와 때밀이 여자를 고용하게 되었다. 이런 광태에 16세기 몇몇 도시에서는 욕조 내에서 남녀 모두 아랫도리를 가리도록 규제를 가했으나, 이 규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신체접촉에 따른 매독 감염의 방지를 이유로,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엄습한 흑사병으로 인해 목욕탕은 순식간에 전멸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신라 사찰의 대중목욕탕

목욕탕의 사용이 중지되자 몽테뉴는 “나는 목욕이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몸을 씻는 습관을 잃어버림으로써, 건강상 불이익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프랑스인이 위생관념과 청결의 습관을 잃어버린데 대해 한탄했다. 대중 목욕탕이 사라지게 된 또다른 이유는, 온수가격이 오른 탓도 있었고, 대도시 부근의 연료용 나무가 고갈된 탓도 있었다. 하여 16세기에는 가정에 목욕탕이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으며, 간단한 목욕을 위해 주석이나 나무통을 이용했다. 향수가 유행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대중 목욕탕의 소멸에 따른 것으로서, 몸을 씻기 어렵게 되자 몸의 불결함을 과도한 화장과 향수 사용으로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귀부인의 방 근처에는 시녀가 손에 향수병을 들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신사들은 몸에 향수를 뿌린 다음에야 귀부인을 방문했다. 특히 여자들은 목욕을 하는 대신에 온몸에 향수를 적신 다음, 화장품으로 마무리 단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다시 유럽에서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터키탕, 러시아탕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매춘 행위’ 또한 목욕탕과 함께 부활하였다. 그러나 17~18세기 모든 사회계층이 고대나 중세만큼 청결을 유지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루이 14세는 1647년과 1711년 사이에 기록한 건강일지를 보면, 64년 동안 1665년 단 한번 목욕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틀마다 포도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것으로 세수를 끝마쳤다고 한다. 1664년 영국작가 사무엘 페피의 부인은 난생 처음으로 대중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는 체험을 한 뒤 남편에게도 목욕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래야만 ‘밤의 봉사’를 수행하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통에 남편은 사흘 동안 버티다 끝내 목욕탕으로 향했다. 당시 서민층의 가정 주부나 유모들조차 갓난아이를 씻기는 것 이외에는 물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19세기까지도 이어졌는데, 1841년 영국의 윌리엄 액턴경은 영국 부인들을 향해 “신체의 다른 부분을 씻기는 하지만, 그녀들 자신이나 남편을 위해, 깨끗한 물이 음부에 닿는 것을 싫어하는 것같다.”며 유감스러움을 토로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구강 성교가 유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청결의식과 더불어 종교의식으로 승화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귀족들의 집에는 대부분 목욕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사찰에서는 승려와 신도들을 위해 커다란 대중 목욕탕을 설치했다. 당시 목욕용 향료 또한 일상생활에 널리 쓰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서천왕 17년(286년)에 왕이 온탕에 가서 유락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보다 더 목욕을 즐겼다고 하며, 남녀 혼욕의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도경>에는 사람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강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여인들은 목욕용 모시치마를 입고 물에 들어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의식으로 인해 목욕문화도 퇴색하고 말았다. 현대적 개념의 대중 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서 비로서 선을 보였다.

일본의 직업여성, 유나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불교 사찰에 온실이라는 대중 목욕탕을 두고 있었다. 당시 일반인들은 욕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용객이 많아지자 절에서는 경제적 부담을 느껴 보시의 개념에서 약간의 돈을 받았다. 이 점에 착안해 헤이안 시대에 업자들은 시중에 대중 목욕탕을 지어 돈을 받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대도시에는 상당수의 대중 목욕탕이 생겨났으며, 16세기 에도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도시마다 빠짐없이 대중 목욕탕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의 목욕 풍속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이 많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남녀 혼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그 모습을 감추었지만, 아직도 지방의 온천 등지에서는 혼욕을 하는 욕탕을 만날 수 있다. 약 10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혼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일본의 혼욕에 대해 “남녀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목욕을 하는 것이 정말 기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50년대 말 미국의 존스턴 선장은 일본 남녀의 혼욕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을 여행기에 묘사하면서,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일본에서의 남녀 혼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미 713년경 문헌인 <출운풍토기>에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노천 온천에서 남녀노소 구별 없이 물로 병을 치료했다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시대에 남녀 혼욕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렸지만, 목욕탕 업주들은 이런 규제를 지키지 않았다. 남녀 혼욕의 목욕문화가 본격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명치시대에 들어서면서인데, 당시 몇몇 도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1868년에는 외국인이 드나드는 도쿄 지역 대중 목욕탕의 혼욕을 금했고, 이듬해 도쿄 전역에 혼욕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또 1870년에는 혼욕은 물론 밖에서 벌거벗은 손님이 보이지 않도록 욕탕에 발을 치도록 명했으며, 1890년 도쿄에서는 7세 이상의 어린이부터 혼욕을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혼욕의 풍습은 이 때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본에는 혼욕하는 대중 목욕탕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오늘날에는 성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터키탕’이 생겨나 공개적인 섹스의 배설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목욕탕을 이용해 성적 욕구를 해결해 온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남자들의 목욕 시중을 들고, 목욕이 끝난 후 접대하는 직업여성을 옛날 일본에서는 ‘유나’라고 불렀다. 유나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무로마치 시대였는데, 유나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때는 에도 시대였다. 당시 성황을 누리던 욕탕에는 대략 30명 내외의 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목욕문화가 현대에 접어들어 ‘터키탕’과 만남으로써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그러고보면 목욕이란 것이 순수하게는 인간의 몸을 청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청결한 의미만큼이나 음탕하고 불결한 목적을 숨기고 있음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목욕에 관련한 인간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결한 동시에 불결하다고.

*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 http://gurum.tistory.com/

* 본 기사에 대한 무분별한 퍼가기와 출처 없이 이 기사를 블로그(엠파스, 네이버, 다음)에 올린 블로거가 많습니다. 삭제바랍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