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아 다음에는 차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렴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차를 끌고 길을 나서는데, 매일같이 지나가는 마을 앞길에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습니다.
차가 가까이 왔는데도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다가가보니,
녀석은 이미 이 세상 고양이가 아니었습니다.
논자락과 하천을 따라 난 시골길에서 녀석은 로드킬을 당한 것입니다.
검은색과 갈색, 노랑무늬가 뒤섞인 카오스 고양이였는데,
크기나 생김으로 보아 3개월도 안된 아기고양이가 분명했습니다.
시골길이긴 해도 마을을 드나드는 차가 제법 많은 길이었고,
하필이면 도로 한복판 쯤에 주검이 놓여 있는데다
그 길은 아이들의 등굣길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일단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아기고양이의 주검을 풀섶으로 옮겨주었습니다.
아기고양이의 몸이 싸늘하게 굳은 것으로 보아
어젯밤쯤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녀석은
두어 번 나와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한달쯤 전이었을 겁니다.
밤이 되면 종종 나는 아내와 함께 동네 아래까지 월야산책을 다녀오곤 하는데,
어느 날 논둑길 가로등 아래서 5마리의 아기고양이와 한 마리의 어미 고양이가
공터에 세워놓은 차 앞에 오종종 나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고양이 2마리는 노랑둥이였고, 나머지는 각각 삼색이, 고등어무늬, 카오스 고양이였습니다.
이사를 한 뒤, 처음으로 만나는 고양이 대가족이었습니다.
도심의 길고양이보다 먹이 구하기가 훨씬 어려운 시골의 고양이인지라
나는 집으로 들어가 고양이캔을 가져다 녀석들에게 노놔주었습니다.
이후 이 고양이 대가족은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 만났던 아기고양이로 추정되는 노랑이 한 마리는 자주 월야산책길에 만났고,
노랑이와 삼색이가 함께 있는 모습도 두어 번 정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전쯤, 처음으로 고양이 대가족을 만났던 그곳에서 홀로 앉아 있는 카오스 고양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로드킬당한 고양이는 그 녀석으로 추정됩니다.
세상에 나온 지 고작해야 3개월,
그동안의 배고픔과 아픔을 말해주듯
아기고양이의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풀섶으로 주검을 옮기면서 나는 아주 잠깐
녀석의 작고 부푼 발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녀석이 걸어온 팍팍한 길과 힘겨운 묘생이 굳은살로 박힌 저 발바닥!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기고양이의 발바닥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고양아!
부디 다음 세상에선 ‘사람도 없고, 차도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렴.
* 고양이의 사생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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