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함께 시속 4km
파란대문을 빠져나온 달타냥이
늦은 오후의 거리를 가만가만 걷는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옥수수는 많이 컸나, 길가의 옥수숫대도 구경하고
고추는 다 익었네, 고추밭도 둘러보고
댑싸리에 얼굴도 묻고,
마을회관 앞에 주차된 빨간 차 그늘에 앉아 한참이나 쉬다가
느적느적 소나무 언덕길로 들어선다.
낯선 사람을 피할 때는 그렇게도 빠른 녀석이
산책에 나설 때는 더디기만 하다.
밤나무에 걸린 구름은 녀석의 더딘 걸음보다 더 느리게 하늘을 건너간다.
고양이의 하얀 솜털을 닮은 뭉게구름이다.
더디게 가는 고양이가 더 느린 구름을 본다.
나도 녀석의 꽁무니를 따라 가만히 걷는다.
고양이와 함께 시속 4km.
그마저도 밤나무를 지나 묏등 앞에서는 걸음이 멈추었다.
산책하던 고양이는 아예 풀섶에 주저앉아
하얗게 핀 망초꽃을 구경한다.
망초꽃에 앉은 풀벌레를 구경하는 것인지도.
해는 조금씩 서산으로 기울어가는데,
나는 자꾸만 오줌이 마려운데,
저녁에는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던데,
바쁘면 먼저 내려가라고
아랑곳없이 고양이는 언덕의 평화와 오후 다섯 시의 적막에 빠져 있다.
나에게는 시계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은 고양이에게 있는 듯했다.
오늘은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밭을 매러 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말없이 고양이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하루가 더 빨리 가지는 않아요.”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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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2010.08.11 12:13
이런 동화스러운 호젓한 산책이 오랜만이십니다
달타냥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 힘든 가장이 되었는데도
이 구름에 달가는듯한 멋진 산책 아직 즐기고 있군요
산책의 운치라면 또 우리 봉달이를 빼노을수 없을 것인데 ...
자꾸 나이가 들어 그런지 좋은 것을 보아도 서글픈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바람이 무덤가에 피었던 노란 민들레는 홀씨가가 되어 멀리 멀리 날아가
바람이의 이생에서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을까요?
모두가 그립고 그리운 날입니다 -
beth 2010.08.11 15:03
아~~ 둘이 이래보니 너무 잘어울리네요.
타냥이 아가들 보고싶어 책이 마구 마구 기다려집니다.
오늘 회사 사보를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이용한작가님의 짧은 약력과 함께 여기
블로그 사진들이 너무나 이쁘게 나왔네요. 고양이 천국 할머니 이야기까지~
어찌나 반갑고 또 새롭던 지요 ㅎㅎ 이 글을 보고 이 블로그와서 또 보고 ^^
사보를보고 우리 회사에는 고양이를 사람과 공존하는 생명체로 인정해주는
사원들만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
나비 2010.08.11 20:27
마지막 뒤돌아 보는 달타냥 모습이 너무 이쁘네요..
고양이와의 산책..
달리님 계신곳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여 사진으로는 늘 이상향으로 보이는데
그기도 사람사는 곳이라 사진으로 보이는 액면이 다는 아닌가 봐요... -
미남사랑 2010.08.12 13:11
달타냥 보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랭이와 랭보 그리고 루,체는 어떻게 지내죠??
루, 체가 많이 컸겠군요..보고싶어요 어디서 볼수 있을까요? 이 가족냥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