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조금은 따뜻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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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금은 따뜻했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우리집을 찾아오는 길고양이 바람이에게
사료를 내놓은 것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1년이 되도록 바람이는 별로 변한 게 없다.
바람처럼 왔다가 뚱하게 앉아 사료를 먹고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만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겨울이 시작될 무렵 급식용 그릇을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으로 바꿨다는 것.
우리 동네 왕초 고양이 노릇을 하는 바람이 녀석은
그동안 우리집으로 먹이동냥을 왔던 고양이들을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쫓아버리곤 했다.
나는 이것이 먹이가 충분치 않아서 그런가, 생각되어
충분히 먹고도 남을만한 큰 그릇에다 사료를 부어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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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3마리나 뇌물로 갖다바친 거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올 때마다 애용해주지 뭐 까짓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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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녀석 사료가 남아돌아도
여전히 다른 녀석이 문앞에서 기웃거리면 야르릉거리며 쫓아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가끔 바람이가 없는 틈을 타 다른 고양이들이 다녀가긴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바람이의 영역 반대편인 논배미 아래쪽으로부터 우리집 테라스 앞까지
먹이원정을 온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족히 3마리의 고양이는 돼 보였다.
사실 우리 동네에는 길고양이가 그리 흔하지 않다.
길고양이 보고서 구독자들은 블로그에 올라오는 고양이들이 모두 우리 동네인줄 알고 있지만,
축사냥이를 비롯해 개울냥이네, 까뮈네, 봉달이 녀석들 모두
우리 마을에서 3~4km 떨어진 이웃마을 고양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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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수도가 다 얼어서 할수없이 개울물을 마셔야지 뭐.

우리 마을에는 바람이와 달타냥이 내가 만나는 유일한 고양이들이다.
가끔씩 턱시도 한 마리와 고등어무늬를 한 중고양이와 새끼 노랑이를 동네에서 본 적이 있지만,
자주 만나는 편이 못된다.
여러 번 밝혔지만 바람이는 사진 찍기가 가장 까다로운 녀석이다.
녀석은 테라스 아래서 밥도 먹고 쉬다가 그냥 훌쩍 가버리곤 한다.
밥그릇을 꺼내 마당에 내놓지 않는 한
녀석이 마당에 나오는 일은 없다.
이번 겨울에도 녀석은 내내 테라스 아래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녀석이 우리집에 오면 늘 테라스 아래 머문다는 것 때문에
나는 지난 12월 중순 녀석에게 줄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공사장 인근에서 꽤나 크고 두꺼운 스티로폼을 구해다 테라스 아래 넣어둔 것이다.
바람이 녀석도 그것이 자신을 위해 가져다놓았다는 것을 아는지
그날 이후 녀석은 그 스티로폼 방석을 애용했다.
테라스 아래 머무는 동안 언제나 녀석은 그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여러 번 ‘새’를 갖다 바친 녀석의 뇌물도 있고 해서
나도 녀석에게 보답의 선물을 한 셈이다.
그래서 조금은 이번 겨울이 따뜻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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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개울물 마시는 거 첨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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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치고 우리처럼 서먹한 사이도 드물 것이다.
예전에는 녀석과 좀더 친해보려고
녀석의 발라당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요즘에는 그저 욕심을 버리고 녀석이 밥이나 먹고 가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를 좋아하는 몇몇 구독자들은 바람이를 보여달라고 댓글 시위도 하지만,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녀석은 언제나 변함없이 잘 있다.
우리집에서 밥을 먹고
개울에 내려가 목을 축이고
가끔 달타냥과 싸우기도 하면서 녀석은 그렇게 이번 겨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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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야 너 거기 가만 있으면, 안 잡아먹지!

한번은 마을회관 앞에서 달타냥과 싸우는 바람이를 본 적이 있는데,
한 마디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오른발 내려치기 한방에 달타냥은 꼬리를 내리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바람이 녀석 뒷끝 있게 달타냥의 영역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기어이 뒷간 구멍으로 숨은 달타냥에게 한번 더 힘자랑을 해댔다.
한마디로 우리 동네에서 바람이 녀석은
거의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는 폭군적 기질의 왕초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녀석이 우리집에만 오면
뚱하지만
순진한 시골 노총각 모드로 변하는 게 난 참 웃겨서
혼자서 키득거린 적이 여러 번이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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