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도 뇌물을 바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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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뇌물을 바친다는 사실




고양이도 뇌물을 바친다. 누군가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뀌겠지만, 내가 아는 한 이 말은 틀리지 않다. 최소한 우리집을 찾는 길고양이 ‘바람이’의 경우는 이 말을 입증하는 명백한 사례이다.

바람이는 몇 달 전 그동안 먹이를 제공해온 나에게 선물로 쇠박새 한 마리를 물어다놓은 적이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선물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이번에는 바람이가 뇌물을 가져왔다. 뇌물이라고? 그렇다. 이건 명백한 뇌물이다. 이번에는 녀석이 박새 한 마리를 물어다 놓았다. 이것이 뇌물이라는 증좌를 밝히기 위해서는 며칠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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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바람이가 어제 테라스 출입문 앞에 놓고 간 뇌물. 박새 한 마리.

며칠 전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테라스 위로 자주 올라오는 바람이는 그날도 테라스 위로 올라와 이야옹, 이야옹거리며 ‘자 내가 왔으니, 이제 밥을 내놓으시오!’ 하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였다. 그런데 녀석의 행동은 요즘 들어 점점 대담해져서 바로 내 작업실 창문 아래까지 와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였다. 뿐만 아니라 그날은 무슨 일인지 이야옹거리며 바람이가 펄쩍 뛰어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작업실 창턱에 앉아 있던 랭보와 랭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꼬리털과 등털을 곤두세우고는 으르렁거렸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랭보는 거실의 책장 꼭대기로 긴급 대피했고, 같은 수컷으로써 경쟁관계에 있던 랭이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영역을 빼앗길까 두려웠는지 그동안 한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바로 스프레잉이다. 우리 집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스프레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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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와 랭이가 테라스 출입문 앞에 놓고 간 박새를 바라보고 있다. 길고양이 출신 랭보는 계속해서 박새를 달라며 냥냥거렸다.

이날 랭이는 무려 거실과 주방, 내 방을 오가며 세 번이나 스프레잉을 하고 돌아다녔다. 스프레잉 한다고 나한테 엉덩이도 한 대 얻어맞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건 수컷으로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랭보와 랭이의 스트레스와 공포는 거의 극에 달했다. 집냥이의 경우 자신보다 우월한 길고양이가 바로 문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수컷의 경우는 이때 십중팔구 스프레잉을 한다는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다음 날 테라스로 올라온 바람이를 테라스 아래로 쫓아버렸다. 변함없이 먹이 주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되도록 테라스 현관에서 멀리 비켜난, 랭보와 랭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먹이그릇도 옮겼다. 이튿날에도 바람이는 테라스로 올라와 또 다시 이야옹거렸다. 나는 한번 더 바람이를 테라스에서 쫓아낸 뒤, 새로 옮긴 으슥한 장소에다 먹이을 부어주었다. 그렇게 4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테라스로 올라올 때마다 내가 아래로 내려보내자 바람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렇게 나한테 잘해 준 건 위선이었나요?” 딱 그런 표정이었다. 바람이는 바람이대로 어떤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테라스에서 쫓아내고...어쩌면 이 집에서도 쫓아낼지도 몰라. 밥도 안주는 거 아냐?” 아마 녀석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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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바람이 녀석은 테라스에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게다가 가끔 실내에 있는 랭보와 랭이에게 위협을 가하는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어제 드디어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늦은 점심을 먹느라 내가 식탁에 앉아 있는데, 테라스 출입문 쪽에서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바람이가 문앞에 나타났다가 재빨리 테라스 아래로 사라지는 거였다. “아이 저 녀석 또 올라왔네...” 하면서 내가 테라스 출입문 쪽으로 다가서는데, 출입문 바로 앞에 박새 한 마리가 놓여져 있었다. 방금 잡아왔는지 박새는 아직 숨을 할딱이고 눈까지 꿈벅거리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뜬금없이 선물을 가져올 리 만무했다. 며칠 동안 테라스에도 못올라오게 하는 나의 행동을 보고 녀석은 섭섭함과 더불어 급식마저 중단하게 될까봐 “그러지 말라”고 뇌물을 던져준 게 분명했다. 전화에 대고 아내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더니, “그거 혹시 예물 아닐까? 랭보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는...” 어, 순간 나는 ‘뇌물’이라는 내 생각이 잠시 흔들렸다. 이 녀석 그동안 랭보를 점찍어 두고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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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 앞 테라스 아래에 주로 바람이의 먹이그릇을 두었으나, 바람이의 테라스 소동사건 이후 테라스 옆쪽 마당끝으로 장소를 옮겨 먹이를 주고 있다.

하지만 창밖의 로미오에게 랭보는 창문을 걸어잠근 줄리엣이 아닌가. “이래저래 곰곰 생각해봐도 이건 뇌물이라구!” 결국 나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선물은 지난 번에도 한데다 오늘이 무슨 기념일도 아니고... 얘가 무슨 ‘고양이책’ 낸 것을 알리도 없을테고... 예물이라 하기엔 아직 정식으로 상견례도 없었는데... 어쨌든 바람이 녀석도 요 며칠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관계 복원을 꾀하는 뇌물까지 가져온 게 확실하다. 바람아! 밥은 계속 무상제공할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테라스에 올라오는 것도 괜찮다만, 저번처럼 문앞에 바짝 다가서서 랭보 랭이한테 위협을 가하며 뛰어오르지는 말아라. 랭이 스프레잉 하고 나서 이틀 동안 냄새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그러니 우리 협상을 하자꾸나. 테라스에 올라오되, 소동은 부리지 않겠다고. 어떠냐, 이 협정서에 발도장을 찍겠느냐.

* 고양이의 사생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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