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굴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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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굴욕 사건


떠돌이 개에게 쫓겨 올라갔던 나무에서 내려오는 동냥이. 포즈가 다람쥐같다.

이른 아침부터 까치 소리가 요란합니다.
크엉크엉, 개 짖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텃밭 한가운데 높다란 은행나무에
동냥이 녀석이 올라가 오도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두 마리의 개가, 위에는 두 마리의 까치가 동냥이를 노리고 있다.

보아하니 녀석은 두 마리의 떠돌이 개에게 쫓겨
저리 높은 은행나무로 올라간 듯 합니다.
거의 은행나무 3분의 2 지점까지 올라간 동냥이는
가지 사이에 몸을 웅크린 채
나무 아래 죽치고 있는 떠돌이 개의 동정을 살핍니다.


동냥이를 노리는 두 마리의 개와 까치.

설상가상으로 은행나무를 영역으로 살아가는 두 마리의 까치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입한 고양이를 응징하려는지
앙칼지게 깍깍거리며 동냥이 주변을 날아다닙니다
밑에서는 떠돌이 개가, 위에서는 까치가 동냥이를 노리고 있는
그야말로 진퇴양난, 설상가상, 길고양이로서 참 굴욕적인 형국입니다.


동냥이 녀석 높은 은행나무를 거의 3분의 2까지 올라가 있다.

내가 텃밭 공터로 나서자
동냥이는 구조의 신호라도 보내는 듯 내게 구원의 눈빛을 보냅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까부터 시끄럽게 까치 소리가 들리고 개 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합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동냥이가 처음엔 구원의 표정을 짓더니, 나중엔 경계심이 풀려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금 은행나무 아래 죽치고 있는 떠돌이 개들은
우리 동네에서 악명 높은 고양이 킬러들입니다.
녀석들은 모두 다섯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다니며
새끼 길냥이들을 사냥하곤 합니다.
약 한달 전에도 다섯 마리의 개들이 희봉이와 깜냥이를 공격하는 것을
가까스로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모든 위험이 사라지자 동냥이는 나무에서 내려갈 궁리를 한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동네에서 이 녀석들에게 물려죽은
길냥이 새끼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오늘은 그 중 두 마리만이 사냥을 나왔습니다.
우선 녀석들을 은행나무에서 쫓아버려야 했으므로
나는 소리를 질러 두 마리의 떠돌이 개를 멀찌감치 쫓아버렸습니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하는 동냥이.

그러나 까치는 소리를 지른다고 달아날 녀석들이 아닙니다.
두 마리의 개가 달아났음에도 동냥이는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불안한 표정이 여전합니다.
내가 좀더 은행나무 가까이 다가서자
까치 두 마리도 근처 전봇대로 달아나버립니다.


다시 옆으로 다람쥐 자세를 취하며 내려오는 동냥이.

이제 은행나무는 모든 위험요소가 사라졌지만,
굴욕을 당한 동냥이는 여전히 내려올 생각이 없습니다.
모처럼 평화가 찾아오자 동냥이는 나무 위에서
모든 경계심을 풀고, 굴욕도 잊고 꾸벅꾸벅 졸기까지 합니다.


머리를 위로 해서 조심조심 내려오는 동냥이.

그렇게 다시 10분쯤 시간이 흘러
동냥이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나무 밑을 살핍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자
동냥이는 내려갈 길을 모색합니다.
워낙에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바람에 내려가는 일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드디어 나무를 다 내려와 땅으로 뛰어내린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는 나무타기의 달인이나 다름없지만,
길고양이에게는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언제나 더 힘이 듭니다.
동냥이는 마치 등반가가 피켈을 찍듯
날카로운 발톱을 나무 둥치에 찍으며 다람쥐와 흡사한 자세로
조금씩 조금씩 나무를 타고 내려옵니다.


수풀 속에서 동정을 살피는 동냥이.

옆으로 기어 내려오던 동냥이는 땅이 가까워오자
머리를 위로 하고 뒷다리를 지지대로 삼아
한발씩 한발씩 내려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약 3미터 정도까지 내려와서는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풀쩍 땅으로 뛰어내립니다.


골목의 도로를 전력으로 달려서 건넌다.

그러나 동냥이의 경계심은 다시 살아나서
내려오자마자 주위를 기웃거립니다.
텃밭 풀숲에 숨어 잠시 숨을 고른 뒤 동냥이는
인적 많은 도로를 단숨에 내달립니다.
그리고는 집 사이의 비좁은 담장을 지나 2미터가 넘는 벽을 풀쩍 뛰어올라
둥지가 있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주택가 담장을 지나 높은 벽을 뛰어넘어 둥지 쪽으로 올라가는 동냥이.

오늘도 동냥이는 이렇게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사실상 길에서 사는 길고양이는 매순간이 고비이고, 시련입니다.
길 위에 도사린 무수한 위험과 굴욕을 견뎌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길고양이의 묘생인지도 모릅니다.

*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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