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푸른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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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푸른 자전거

                                                                                                                  이용한


 

  내 입이 조그맣게 등푸른, 하면서 자전거가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기억은 가끔 물방울의 오래된 윤회처럼 이미 흘러간 도계 쯤에서 깜박거린다 왜 툭하면 체인이 벗겨지는 겁니까? 자전거포에 앉아서 내가 겨드랑이를 털 때, 수리공은 목장갑 낀 손으로 벗겨진 틀니를 치켜세우며 글쎄요, 했다 만드는 놈과 고치는 놈은 엄연히 다르지요, ‘엄연히’와 ‘글쎄요’의 간격 속에서 나는 


  비틀거렸다 한때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던 내가 탄가루 날리는 역전에 광부처럼 앉아 있는 이것을 중독이라 하는 것인지, 느닷없는 절연과 전도 사이에서 감전된 이것을 미쳤다고들 하는 것인지, 역전다방 붉은 셔츠는 실밥 터진 눈으로 연방 웃음을 날리고, 누구나 다시 쓰고 싶은 자서전을 가지고 있어요, 나쁜 놈, 사기꾼, 엉터리, 멍청이, 변덕쟁이, 찢어버리고 싶은, 선량한 마초이거나 광포한 에고이스트


  당신은? 이라고 묻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랑만으로 모든 걸 눈감아 줄 수 있다면 벌써 난 눈멀었겠지만, 등푸른 자전거는 침울하고, 기억과 망각을 오르내리던 오랜 귀가들은 덜커덩,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길이나 핥아온 내가 길 밖에서 배울 수 있었던 건 쉽게 포기해버린 관계이다 차라리 숲의 관능과 구름의 변명을 믿어볼 일이다 언필칭 식자들이란 총을 든 사냥꾼 앞에서는 개처럼 엎드린다 그러나 가끔은 대로에서


  당당히 교미할 수 있는 개처럼 살지 못했다는 것, 겨우 입을 벌리고 억지로 웃은 기억밖에 없다는 것, 추억이란 내 입술에서 휘발하는 그녀의 조용한 술냄새 같은 것이었고, 합병증으로 고생한 어머니의 희박한 숨결 같은 것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죽을 때까지 물고기만 잡다가, 평생을 순대국만 팔다가, 허구헌날 곰인형 눈이나 붙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냥 죽는 것이다 누구도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 저주를 뿌리칠 수가 없다 부단히 벗어나고자 했던 등푸른 자전거는 여전히 막차 끊어진 역사에 정거해 있다 생선인지 물고기인지 불분명한 날것을 삼키며 나는 식당의 어떤 비릿한 인생을 용납한다 목엣가시처럼 남은 어떤 연애도 꾸역꾸역 집어삼킨다 혀끝에 맴도는 자전거의 껍질과 무늬는 쉴새없이 똑딱거리고, 나는 사랑했었다, 사랑했었다는 기억만이 나를 속도의 끝으로 밀어간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 있던 열두살의 겁쟁이는 이제 마흔살의 허깨비가 되어 앙상한 비탈길에 앉아 있다.  



   -- 시집 <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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