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벌레의 손바닥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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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벌레의 손바닥 여행

모처럼 시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막 아침 산책을 나서려는데,
뒤늦게 잠에서 깬 아내가 ‘이것 좀 보라’며 나를 불러세웠습니다.
무당벌레였습니다.
아내의 달콤한 휴일 늦잠을 깨운 녀석도 바로 이 녀석입니다.

얼굴에 무언가가 기어다녀 탁 쳐내고 보니, 무당벌레였다는 겁니다.
아내는 녀석을 팔뚝에 올려놓은 채 밖으로 나온 것인데,
무당벌레는 태연하게도 팔뚝을 기어올라 손가락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녀석이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녀석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습니다.

팔뚝을 등정하듯 힘겹게 올라온 녀석은 이제
손바닥을 개울 건너듯 뒤뚱뒤뚱 걸어서
엄지손가락을 향해 갑니다.
마치 이 요상한 ‘살봉우리’의 정상을 밟아보려는 듯
녀석은 참 열심히도 걸어서 허위허위 엄지손가락을 올라섭니다.

드디어 녀석이 엄지 봉우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녀석은 기뻐할 틈도 없이 방향을 돌려 다시 엄지손가락을 내려갑니다.
마치 반환점을 돌듯 녀석은 엄지손가락 끝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손바닥을 향해 하산합니다.

녀석이 뒤뚱뒤뚱 손바닥을 내려가는데 한참이 걸립니다.
급할 이유가 없다는듯 몸소 '슬로 라이프'의 전형을 보여주겠다는듯
녀석은 잠깐씩 손금 위에 앉아 손금도 보면서
느긋하게 손바닥을 내려갑니다.
내려와보니 다시 아까 출발했던 팔뚝입니다.

그대로 두면 녀석은 왼종일이라도 팔뚝에서 엄지손가락까지
공연히 헛걸음질만 칠것같아
녀석을 슬쩍 손가락으로 집어 마당 한 구석 이끼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녀석은 이제 이끼 위를 여행하기 시작합니다.

녀석에게 이끼의 숲은 밀림과도 같아서
우거진 솔이끼가 아득히 높기만 합니다.
한참이나 이끼숲을 건너가던 녀석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니 이제야 시동이 걸렸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딱지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릅니다.

무당벌레가 잠시 앉았다 간 이끼의 숲도
무당벌레가 기어간 아내의 팔뚝과 손바닥도
갑자기 심심해졌습니다.
무당벌레가 날아가고 나니 세상이 다 심심합니다.

*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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