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지극하고 명옥헌은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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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지극하고 명옥헌은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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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새원 광풍각에서 아이들은 자연을 듣는다.

시원하고 애잔한 길이 숲으로 나 있다. 대숲 바람에 귀를 씻고, 계곡 물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자리한 소쇄원으로 가는 길이다. 소쇄원은 이제 너무나 유명해져서 사람이 붐비는 명승지가 다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소쇄원이 간직한 깊은 의미와 정원의 미학은 그동안의 세월만큼이나 무궁하고 첩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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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문에서 제월당 가는 길의 늙어 죽은 나무.

애당초 소쇄원이라는 이름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깨끗함과 시원함’은 바로 계곡의 물줄기와 조용한 숲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쇄원은 정원 전체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옛 정원문화의 전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쇄원은 입구에 대숲이 들어서 있고, 대숲을 벗어나면 계곡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애양단이, 왼쪽에는 광풍각과 제월당이, 계곡에는 물소리와 물 흐름을 그대로 살린 오곡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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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재 노릇을 했던 제월당.

제월당이 서재 노릇을 했다면, 광풍각은 손님을 맞는 사랑방이었으며, 애양단은 휴게소요, 오곡문은 탁족을 하거나 심신을 씻는 공간에 다름아니었다. 특히 오곡문의 돌담은 두 개의 물 통로를 뚫어 계곡의 물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연스런 물소리의 퍼짐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자연의 소리까지도 정원의 설계에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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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설계한 오곡문. 심신을 씻는 곳이다.

소쇄원은 인공정원이기보다는 자연정원에 가까운 정원이다. 과거에는 오곡문 아래 계곡에 물레방아를 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고, 다만 통나무 수로인 귀애(통나무에 홈을 파 물이 흐르게 만든 수로관)를 두어 작은 연못에 물을 대고 있다. ‘소쇄’는 소쇄원을 꾸민 양산보(1503~1557)의 ‘호’이기도 한데, 조선 중기 홍문관 대사헌을 지낸 양산보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당하자 모든 출세의 뜻을 접고 낙향하여 대숲과 계곡이 어울린 이곳에 소쇄원을 짓고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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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앞 계곡의 통나무 수로, 귀애.

양산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유언을 통해 ‘소쇄원만큼은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소쇄원을 아꼈다. 이 말에는 정원을 잘 돌보라는 뜻도 담겨 있지만, 후손에게 출세보다는 초야에 묻혀 은자로 살아가라는 묵시적인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런 뜻에 걸맞게 당시 이 곳에는 면앙 송순과 송강 정철 같은 대가들이 즐겨 찾아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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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담장의 이끼는 세월을 덮고 있다.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도 아직까지 옛빛을 고스란히 간직한 정자로 손꼽힌다. 면앙정은 면앙 송순(1493~1583)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곳에 머물며 지은 것으로, 가사(歌辭)인 <면앙정가>의 탄생과 관련이 깊다. 송순에게 사사받은 송강 정철도 훗날 조정에서 물러나자 고서면 원강리에 송강정을 짓고 수년에 걸쳐 은거생활을 했는데, 가사 <사미인곡>은 바로 그 때 탄생한 작품이다. 담양의 정원이 가사문화의 산실이라 하는 것도 당대의 대가들이 이 곳의 정자와 정원을 무대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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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그윽한 명옥헌. 찾는 이가 없어 더욱 좋은 곳이다.

담양에는 옛빛을 고스란히 담은 정원과 정자가 유난히 많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연관된 송강정을 비롯해 식영정, 독수정, 상월정, 남희정, 명옥헌 등의 정원이 모두 담양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중에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명옥헌이다. 명곡 오희도(1583~1623)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에 배롱나무(백일홍)와 적송을 심어 여름이면 물에 비친 붉은 백일홍과 짙푸른 소나무와 하늘의 빛깔이 그지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 곳에 심어진 약 20여 그루의 배롱나무는 수령이 모두 10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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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연못은 주변의 백일홍과 하늘과 구름을 다 담고 있다.

담양을 찾는 많은 이들이 소쇄원을 찾고 있으나, 연못 주변의 풍경은 담양에서도 단연 명옥헌이 으뜸이다. 나는 연못과 배롱나무를 구경하고 정자 마루에 누워서 한 시간 이상 낮잠도 잤다. 그리고 주제넘게 <명옥헌 배롱나무>라는 시도 한편 적었다.

물 위의 경전은 구름과 같아서 지나고 나면 읽을 수가 없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그 옛날 아무개 선비처럼 나는 하루를 명옥헌에 은둔했다 소쇄원도 아니고 독수정도 아닌 명옥헌에서 나는 헐거워진 나를 등지고 무작지작한 정원의 풍경을 본다

- 이용한, '명옥헌 배롱나무', <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 중에서.

*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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