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옥 <도무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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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무지들

                                                                              신동옥



'더이상 친구가 없어' 너는 말한다. 그럼 술잔 건네주던 이는 누구지?
원한다면 '너는 한없이 길게 쓸 수도 있었잖아'
채근하던 친구 앞에서 꽃잎을 세어가듯 안으로 귓바퀴를 착착 감아 넣어보지만

처음에는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랑한다' '아니다' '사랑한다' '아니다'
쓰고 읽는 사이 더이상 떼어낼 이파리도 없어져버렸다


너는, 목젖을 매만지며 성대 안으로 공기는 지나는지
언제나 더 깊은 숨을 들이쉬어서 산소 중독이 되었다. 들숨을 헉헉거리며
방구석에서 늙어버린 손가락을 펼쳐 부끄럽게 하나씩 '친구'를 짝 지어본다.
서랍 속에서 오래된 '그 짓' 뭉치를 끄집어내 오래도록 바라보지만
'더이상 친구가 없어'

벽에 손을 짚고 반성 없는 '그 짓'을 기약하지만
언제나 무언가 꽉꽉 차 있어 스미어 나와 피고름이 줄줄줄 흘러내리는데
'누가 그걸 떠메어 갈까'

십자말풀이식으로
사방에서 너를 훑고 가는 머리말들이 가득한 방 안에서
마주 잡은 친구의 손길은 차라리 따뜻한 빵이었지만
밤새워 되짚어도 손가락은 열 개 하지만

더이상 친구가 없어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무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니?
'알 수 없는 곳에 가득해지는 도무지들'
눈을 콧잔등에 모으고 사방 연속무늬 벽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
거짓말처럼 까실하게 일어서는 것들
비비고 만지면
대궁만 남은 꽃도 네 눈알에 자리한 가시보다 날카로워

벽에 등을 돌리고 손을 뻗어도
'네게는 네가 제일 멀어'
'이상도 하지'
아무런 징후도 없이 믿을 수 없는 것들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늘어진 근육 뭉툭해진 손가락으로 하나 둘 다시 하나 하나
조각난 꽃잎마다 '사랑한다' '아니다' 다시 '아니다' '아니다'
더이상 감아 넣을 귓바퀴도 찾을 수 없어
'너를 한없이 작아지게 하는 도무지들, 한없이 낯설게 하는 도무지들'

처음에는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한없이 길게 쓸 수도 있었지만
손뭉치만 남은 팔로는 이런 '그 짓'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더이상 친구가 없어


* 신동옥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 200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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