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운명과 비극: <은밀한 여행>(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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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운명과 비극: <은밀한 여행>(랜덤하우스, 2007)



"석탄가루 날리는 도계의 여인숙에서, 팽목 항구에 나앉은 바닷가 민박집에서 나는 몇 번이나 나의 역마살을 탓했다. 도마령 길목의 상촌 굴다리에서, 폭설을 뚫고 기어이 올라간 윗면옥치 길 위에서 한번 더 나는 부딪히고 미끄러졌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 비릿하고 덜컹거리며 갸륵한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나에게는 오라고 한 적도 없는 31번 국도가 눈앞에 펄럭였고, 꽃 피는 샛령 숲길이 발목을 잡아끌었다. 봄에는 남해 물미도로의 향긋한 바람이 나를 불렀고, 가을이면 외롭고 높은 황조리의 산마루가 그리웠다." _ <머리말> 중에서.


"강원도 사람들은 숲으로 나무하러 갈 때 강원도 나무타령을 잘도 불렀다. 동네마다 노랫말도 다르고, 음정도 다르지만 대개는 이런 식이다. 엎어졌다 엄나무, 잘 참는다 참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자장자장 자작나무, 늙었구나 느티나무, 방귀뽕뽕 뽕나무. 아무래도 이런 숲길에서 불러야 제격인 노래가 나무타령이고, 음정 박자 무시하고 불러야 더 제격인 노래가 나무타령이다." _ <문명을 비켜선 은밀한 산중마을> 중에서


아이에게 엄마는 감자가 땅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게 감자밭이야. 이 줄기 끝에 감자가 달려 있어."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먹었던 감자튀김이나 포테이토칩이 저 지저분한 땅속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시큰둥했다. 맘씨 좋은 농부는 금방 캐낸 주먹만한 감자 하나를 아이에게 건넸다. 그러나 아이는 오히려 흙이라도 묻을까봐 손을 뒤로 감추며 엄마만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가자." 엄마는 감자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감자밭을 떠났다. (중략) 아무래도 시간은 그 농부에게 있는 것같았다. 아이와 함께 떠난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감자도 캐지 않고, 해 떨어지기 전에 그 감자를 다 날라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급하게 감자밭을 빠져나왔을까." _ <거룩한 모성> 중에서


"부엌에서 선글라스를 쓴 노인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해도 넘어간 마당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니! 알고 보니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흙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고, 혼자 밥을 하고, 혼자 잠을 잔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로웠던지 그의 집에는 네 마리의 개와 이제 막 장난을 치기 시작한 배냇강아지가 여덟마리나 됐다. 앞을 볼 수 없으면서도 무려 열두 마리의 식구를 그가 먹여살리고 있었다." _ <천연한 물길, 산길> 중에서


"사북 지나 고한에서 만난 폐광촌의 저녁은 아팠고, 정암사 계곡의 겨울은 열목어의 남방 한계선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구미정에서 만난 샛강 여울의 물소리는 오래 귓전에 부딪쳤으며, 오십천 숙암리의 밤은 너무 길었다. 안개가 자욱했던 새벽녘에 터미널 여관을 빠져나와 조양강을 향해 달려갈 때, 차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풍경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지나치게 뾰족하지도,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은, 왜곡되지 않은 저 산천의 골격만으로도 겸재가 추구했던 풍경의 리얼리즘은 충분해 보였다." _ <순진한 시골> 중에서



"그는 소가 하는대로 쟁기질을 했다. 소가 쉬면 농부도 쉬고, 소가 저리 가면 농부도 저리 가고. 농부는 마음이 약해 소를 때리진 못하고 이러이러, 소리만 외쳤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그는 겨우 두어 고랑을 내고는 워워, 풀밭으로 소를 데려가 연하고 맛좋은 봄풀을 뜯긴다. 보아하니 데리고 나온 소는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농부는 소를 다그치지 않는다. 그의 말인즉슨 올해 처음으로 하는 일이니, 처음부터 너무 닦달하면 끝까지 닦달하게 된다는 거였다. 소를 모는 그의 등 뒤로 소량포구의 물빛이 하염없이 푸르다." _ <봄이 상륙한 바닷가> 중에서


"여행은 예측불허한 것이며,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온 나의 목적은 목적이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계획한 것이 없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 나는 여행이 나를 풍료롭게 하거나 좀더 인간답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런 생각은 여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낯선 풍경과 바람,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길,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악수, 생경한 곳에 던져진 이 '던져졌다는 느낌'이 나를 또다른 곳으로 밀어갈 뿐이다." _ <길 끝에서 만나는 비릿한 풍경> 중에서


"저 강물을 보고 있으면, 그 옛날 학교에 가기 위해 매일 아침 나룻배를 타던 기억이 밀려오곤 한다. 한쪽 팔이 없던 사공은 늘 10분씩 늦던 나를 기다렸다가 배를 건네주곤 하였다. 나루터에서 15리는 더 신작로를 따라 가야했던 학교. 학교에서 돌아와 다시 나루터에 서면 동네 아이들은 합창하듯 '배 건너와요'를 외쳤다. 그러면 어김없이 건너편에서는 외팔 사공이 천천히 삿대를 질러 우리 앞에 배를 갖다 댔다. 그때만 해도 마치 구원을 기다리듯 '배 건너와요'만 외치면 언제든 나를 향해 건너오는 뱃사공이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옛날 외팔 사공이 어떻게 그 넓은 강을 삿대와 노만 저어 건너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멀쩡한 두 팔은 지금 나룻배도 젓지 않는데, 이토록 뻐근하지 않은가 말이다." _ <호반을 따라가는 70리 에움길> 중에서


"당신상은 일부러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신상의 모습을 매혹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그저 있는 돌에 윤곽선만을 새겨 얼굴을 그려냈고, 얼굴 부분을 제외한 몸뚱이는 그대로 현무암의 거친 질감을 살려 자연미를 드러냈다. 이것은 돌하르방처럼 과장되지도 않았고, 장승처럼 무서운 모습도 아니다. 그저 옆집 할망의 인자한 모습이요, 뒷집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다.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기에 앞서 친근하고 천진하며 해학적이어서 누구라도 편하게 다가가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좋을 듯한 얼굴! 저기서 당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가만 보면, 당신은 조용히 울고 있다." _ <당신상을 아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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