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에 뒹구는 가을 그림자
가을은 공원 한편의 팥배 열매처럼 익어간다.
가을볕 부신 오후에 책가방을 집어던진 아이들은
은행잎 지는 황금빛 골목에서 공을 차며 논다.
수능을 보고 돌아온 여고생은 아쉬움과 안도감과 후회가 뒤섞여
한참이나 바닥에서 주운 은행잎을 만지작거린다.
아무도 지금은 진정한 행복의 척도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한 세상을 신념으로 살 수는 없다.
정작 우리가 다녀야 할 학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고,
고작 우리는 한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
한권의 책은 집도 학교도 아닌 다른 곳에 있다.
다른 곳을 에둘러 돌아온 노인들 몇은 지금
낙엽이 지는 공원에 앉아 지나온 것들을 본다.
이미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본다.
그것은 길고 멀었으며, 아득하고 하염없었다.
가을은 공원 한편의 팥배 열매처럼 익어간다.
은행잎은 자꾸만 떨어지고
오래 방치한 자동차는 은행잎에 묻혀간다.
고요한 은행잎 무덤!
골목을 빠져나온 한 할머니는
이제 막 생을 시작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을 골목으로 나선다.
경제가 어려워도 어김없이 가을은 오고
세계가 망할 지경인데도 어김없이 가을은 온다.
누군가는 지금 낙엽 위에 뒹구는 자신의 그림자를 탓할 것이다.
누군가는 또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꽂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고,
누군가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저녁이 올 것이고, 집집마다 불이 켜지듯
하늘에는 이제 총총 별이 켜질 것이다.
가을은 공원 한편의 팥배 열매처럼 익어가고,
나는 숨죽여 은행잎 지는 골목을 지나 집으로 간다.
입술을 약간 오므려 '지입'하고 발음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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