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종이, 한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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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종이, 한지를 말한다


호암미술관에는 현존 필사본 화엄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신라백지묵서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6호, 755년경)이 보관돼 있다. 1200년이 훨씬 넘은 이 묵서는 매우 희고 광택이 나며, 얇으면서도 먹이 번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지면 탄력이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밀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성서가 부패되는 것을 염려해 암실에 넣어둔 채 500년의 역사를 세계에 뽐내는 것에 비하면, 이 신라 때의 묵서는 1200년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그 세월을 애써 자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500년쯤 되는 고서들은 인사동이나 골동품 가게에 가면 너무 흔하게 만나는 것이어서 자랑할 것도 못되는 실정이다.

알다시피 이 오래된 고서들은 모두 한지로 만들어졌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종이, 그것이 한지다. 그럼에도 우리 한지는 서양 펄프에 밀려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요즘에는 한지마저 싸구려 중국산이 들어와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니, 전통 한지의 설자리는 이래저래 좁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어려운 형편에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리 한지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바로 안동에 있는 풍산 한지다. 한지는 과거 전주산을 으뜸으로 쳐왔지만, 지금은 생산공정이 대부분 기계화되었고, 전통 방식을 여전히 고수해오는 곳은 원주와 괴산, 풍산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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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한지의 초지공이 물질로 종이를 뜨고 있다.

풍산 한지는 최근 문화재청의 요구에 따라 앞서 말한 신라 화엄경의 영인본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낸 곳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수공업 한지의 방식을 유지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풍산 한지에 도착했을 때, 철썩철썩 대발로 물질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8명의 초지공(물질로 종이를 뜨는 장인)이 두 곳의 작업장에서 한창 종이를 뜨고 있었다. 예부터 우리에게는 면지, 마지, 피지와 같은 여러 종이가 있어 왔지만, 우리네 전통 종이라고 하면 단연 닥껍질을 원료로 한 닥종이였다. 하여 보통 한지라고 하면, 이 닥종이를 가리킨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바로 원료가 되는 닥의 채취로부터 시작된다. 닥나무는 늦가을 추수를 끝내고 나서 1년생 가지를 베어와 삶게 되는데, 과거에는 닥나무를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부은 후 10시간 정도 삶아서 껍질이 흐물흐물해지면 껍질을 벗겨 ‘피닥’을 만들었다. 이것을 다시 장시간 물에 담가 부풀린 다음 우러난 겉껍질까지 벗겨내면 한지의 재료인 ‘백피’(백닥)가 된다. 이제 백피는 볕이 좋은 곳에 널어 말리고, 다시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 ‘피삶기’에 들어간다. 피삶기란 백피를 잘라 솥에 넣고 잿물(과거에는 메밀짚이나 콩대를 태운 재를 사용했다)과 함께 끓이는 작업으로, 백피가 흐물흐물해지도록 삶아낸다.

피삶기가 끝나면 ‘바래기’에 들어간다. 삶아낸 원료는 솥에 두고 하룻밤 삭인 뒤, 또다시 흐르는 물에 담가 볕을 쪼여주며 바래기(헹굼과 표백)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들은 어느 정도 현대화가 되어 옛 방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바래기 다음은 티를 골라내는 과정이다. 아무리 삶고 냇물에 담고 했다손 치더라도 원료에는 조금씩 잡티가 남아 있게 마련인데, 이것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는 작업이 티 고르기다. 이렇게 티를 골라낸 닥원료는 닥돌이라 불리는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곤죽’이 될 때까지 사정없이 두들겨 ‘닥죽’을 만든다. 이 닥죽을 지통에 집어넣고 대막대로 한참 저어준 뒤, 닥풀을 섞어 네모낳게 생긴 대발로 ‘물질’(지통에서 대발로 닥죽을 담아내는 일)을 해서 바탕(발로 건진 종이)을 만든다.

이런 과정으로 채곡채곡 쌓인 바탕 위에 돌멩이를 얹어 ‘물빼기’를 한 뒤, 건조시키면 한지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린 한지를 도침기로 수백 번 두들겨 종이의 밀도와 섬유질 형성을 높이면 더 질 좋은 한지를 낼 수 있다. 30년 넘게 종이질을 했다는 초지공 차대윤 씨에 따르면 여러 과정 중에서도 물질하는 과정(종이뜨기)이야말로 가장 힘들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하루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데다 바탕의 두께나 고르기가 일정한 종이를 빼내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에서 오는 ‘감’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닥을 삶는 뒷일부터 시작해 최고의 단계인 초지공에 오르게 됩니다. 능숙한 초지공이 될 때까지 보통 20~30년은 걸립니다. 숙련공일 경우 하루 500~600장 정도의 종이를 만들어요. 그 수백장 종이의 두께와 고르기를 한결같게 만드는 게 초지공의 역할입니다.” 또다른 초지공 안승탁 씨도 초지공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발에 원료가 많을 경우에는 빨리 흔들어주고, 적으면 천천히 흔들어 바탕을 조절합니다. 2천장의 종이를 떠내도 능숙한 초지공일 경우 200~300그램 정도의 차이밖엔 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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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지공이 건조가 끝난 한지를 햇볕에 비춰보고 있다.

현재 이 곳에서 생산하는 한지는 창호지와 같은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고, 노란색, 보라색, 갈색 등 온갖 색상의 색지와 무늬를 곁들인 한지, 벽지용 한지, 포장용 한지, 금박을 입힌 한지까지 다양하다. 한지는 우리의 종이다. 그래서 한지는 우리 민족을 닮아 있다. 질기면서도 부드럽고, 투박하면서도 우아하다. 그 한지를 햇볕에 비춰보면 닥껍질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서양의 종이에서 볼 수 없는 자연의 무늬와 빛깔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오랜 옛날에는 한지로 갑옷까지 만들었다. 한지는 몇 겹으로 겹쳐바르고 옻칠을 해놓으면 그 질김과 강도가 좋아져 화살도 뚫을 수 없어 옛날 일반 병사들은 한지로 만든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최근에는 독성이 강한 서양 벽지 대신 한지를 벽지로 쓰는 아파트도 선보이고 있다. 한지는 서양 종이에 비해 먼지나 냄새를 잘 빨아들이고, 공기를 맑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한지(창호지)에는 입자가 작은 무수한 구멍이 있어 환기와 습도조절을 자연적으로 해낸다. 또한 한지의 질감은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을,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며, 바깥의 빛을 부드럽게 통과시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손색이 없다. 이런 까닭에 한지의 쓰임은 현대에도 다양하게 활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언제쯤 종이가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체로 고구려 때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경을 담은 종이가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이전 시대의 역사적인 기록을 담은 종이가 고분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그 전부터 이미 닥종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품질은 중국의 것보다 뛰어났으며, 종이를 다루어 글을 찍어내는 인쇄술 또한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한발 앞섰던 게 사실이다. 우리의 한지는 원료에 따라 순수 닥종이로 대표되는 저지(저피, 창호지)와 미농지(얇게 뜬 종이, 포장지), 저피에 이끼를 섞어 만든 태지(표구 및 편지지), 목화섬유를 섞어 만든 백면지(고급 백지), 대마섬유를 섞은 마포지(장판속지), 저피에 짚이나 모조지를 첨가한 화선지(서예지 및 화지)를 비롯해 10여 종이 넘었다.

또 제작 과정에서 비단을 씌운 사록지, 포를 씌운 포목지, 쌀가루를 뿌려 두루마리로 만든 분주지도 있었으며, 과거에는 지역에 따라 경주에서 내던 종이를 경지, 완주에서 나는 것은 완지, 서울에서 생산하던 것을 경장지 등으로 불렀다. 원료에 따라 용도에 따라 지역에 따라 한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다양한 쓰임이 있었던 것이다. 흔히 고급 옷감인 비단보다 수명이 훨씬 길어 천년을 간다는 한지. 서양에서 펄프가 들어오면서 한지는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서양에서도 한국의 전통 한지를 세계 최고의 종이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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