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에서 길의 신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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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에서 ‘길의 신’을 만나다



이화리 새점마을의 대감 모습을 한 목장승.

 

가는 날이 장날이다. 2, 7장으로 열리는 청양 장날. “배시감 사유, 배시감 사유.” 장터 들머리에서 소주로 우려낸 감을 고무함지 그득하니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불러놓고 배시감 우려내는 법까지 공짜로 일러준다. 어지간해서는 볼 수도 없는 으름장수도 길바닥에 좌판을 열었다. 칠갑산 깊은 골에서 따온 으름이란다.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볼 때마다 으름장수는 ‘으름’이란 말 대신 “이게 한국 바나나여!” 하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쌍대리 한석골에서 만난 바가지 속의 성냥 한 통.

 

까치내에서 잡아왔다는 가을 참게를 새끼줄에 한 두름씩 엮어 파는 참게장수는 참게 파는 일보다 까치내 참게잡이 얘기에 더 공을 들인다. 딸랑딸랑 종을 흔들며 달구지에 두부를 싣고 가는 두부장수의 “두부 사려!”도 시장통에 아릿하게 울려퍼진다. 청양이 구기자로 유명한만큼 청양장의 절반은 구기자장이다. 시장 한 켠에는 아예 구기자 가게와 좌판이 진을 쳤다. 예부터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일컬어지는 구기자는 일찍이 중국의 진시황도 즐겨 먹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구기자의 여러 가지 약효는 몇 천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는데, <신농본초경>과 <본초강목>에는 구기자를 “오래 복용하면 뼈를 강하게 하며 몸을 가볍게 하고, 늙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갑리 가는 길에 만난 한적한 풍경.

 

청양에는 이번이 세 번째 여행이다. 10여 년 전 대치면 상갑리에 가기 위해 처음 청양 땅을 밟았다. 그 때만 해도 청양에서 상갑리를 들어가자면 비포장도로를 따라 십 리 넘게 들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그 길이 말끔하게 포장되어 옛날의 운치를 찾아볼 수가 없다. 길이 포장되고 나면 다음으로 망가지는 게 살림집인데, 예상대로 상갑리의 집들도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모양이다. 그 많던 흙집들은 상당수가 개축을 했거나 폐가로 남았다. 이건 시멘트공화국인 우리나라에서 불가피한 변화이다. 더 이상 농촌에서 옛날의 전원적인 풍경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향수병일 뿐이다.


상갑리에서 만난 뒷간의 똥오줌을 받아 밭에 뿌리기 위한 분소매 항아리(위). 흙집 앞마당에서 나락 말리는 풍경(아래).

 

그나마 청양에서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준 것은 상갑리를 지나 공주시 쌍대리까지 이어진 비포장길이다. 가는 동안 단 한대의 차도 만나지 못한, 너무 한적하고 조용해서 되레 쓸쓸해 보이는 길. 가는 길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맘껏 그 적막함과 외로움을 만끽했다. 산자락에 버려진 감나무에는 다 익은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이따금 저절로 익은 감이 제멋대로 떨어진다. 한적한 에움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여섯 채의 흙집이 골짜기를 비집고 들어선 한석골이 나온다. 빈집을 빼고 나면 겨우 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 한석골로 내려서자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게 골짜기를 흔든다. 이 집도 저 집도 주인은 없고, 개들만 집을 지키고 있다.


상갑리에서 만난 구기자 말리는 풍경.

 

마을을 한 바퀴 돌고서야 만난 윤봉순 씨(57)는 밥때를 놓친 내게 밥상까지 차려주며 인정을 베푼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내 소매를 끌어다 그예 부엌 앞에 앉힌다. 생면부지의 나그네에게 기어이 밥을 먹이고 마는 인정이 한석골에는 남아 있었다. 가을이 깊어 한석골에는 집집이 무말랭이며 호박고지를 내걸고, 헛간에는 벌써 겨울나기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한석골은 공주와 청양의 경계에 자리한 마을이다. 공주에서도 청양에서도 가기가 만만치 않다. 때문에 한석골 가는 길은 여전히 외로운 길로 남았다. 그 외로움을 넘어가면 다시 청양 땅 이화리가 나온다. 이 고개를 짐때울고개라 부른다.

 

 

이화리 새점마을 길가에서 만난 '길의 신', 목장승. 한 해에 한 기씩 장승을 새로 세우고, 3년이 지난 것은 뽑아서 장승 뒤편에 썩도록 그냥 둔다.

 

이화리(새점마을) 길가에는 나무를 깎아세운 장승을 만날 수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세 기씩 자리한 이화리 장승은 하나같이 옛날 대감모자를 쓴 모습으로 조각돼 있다. 코와 입은 끌로 파고, 눈과 수염은 먹으로 단순하게 그렸다. 이 곳의 장승은 한 해에 한 기씩 세우고, 3년이 지난 것은 뽑아서 장승 뒤편에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둔다.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에 장승제를 지내는데, 이것을 ‘길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라는 뜻에서 ‘노신제’(路神祭)라고도 했다. 알다시피 장승은 길의 신이다. 마을의 나가고 들어오는 입구에서 장승은 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액귀와 행운을 가려서 들이고 가려서 내보낸다. 마을 사람은 길을 떠날 때 장승에게 무운을 빌고, 나그네는 마을로 들어서며 태평을 기원한다.


공주 쌍대리 한석골의 한적한 풍경.

 

이화리와 비슷한 모양의 장승은 대치면 대치리, 정산면 송학리, 대박리, 용두리, 천장리에도 있다. 이 곳들의 장승은 대부분 멋을 부리지 않고 단순, 소박한 게 특징이다. 남장승은 대감모자를 썼고, 여장승은 비녀를 꽂았을 뿐이다. 때로 위압적이고, 때로 해학적인 표정은 먹으로 대충 그려놓았다. 해서 무슨무슨 장승공원의 지나치게 솜씨를 부린 인공적인 장승에 비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실 청양은 마을에서 깎고 세운 장승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뭐 안다고 해서 요즘 사람들이 장승에 관심을 가질리도 만무하다. 장승의 고장답게 칠갑산 장곡사 가는 길목에는 장승공원도 들어서 있다.

 

칠갑산에서 만난 팥배 열매.

 

칠갑산에 온 이상 장곡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장곡사에는 철조약사불좌상과 미륵불괘불탱화같은 국보를 비롯해 장곡사 큰북과 통나무 그릇과 같은 문화재가 눈길을 끈다. 하대웅전 들목에 자리한 통나무 그릇(7미터)은 마치 커다란 쇠죽통처럼 생겼는데, 오래 전 장곡사 승려들이 밥통 대신 사용하던 그릇이라고 한다. 장곡사 큰북도 여느 절의 것과는 영판 다르다. 본래 경을 외울 때 썼다는 이 북은 꼬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상대웅전에서 바라본 장곡사 풍경.

 

지금은 앞뒤가 모두 찢어지고, 구멍이 나 있는 상태다. 조선시대 건물인 설선당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남다르다. 설선당은 참선을 위한 선방인데, 화려하지 않은 겉모양이 되레 정겹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장곡사의 가장 큰 특징은 위 아래 각각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이 자리한 보기 드문 가람 배치에 있다. 상대웅전 앞뜰에는 천년이 넘는 이 절의 역사를 말해 주듯 850년쯤 묵은 홰나무 한 그루도 서 있다. 홰나무 둥치에 서면 장곡사 골짜기가 다 내려다보인다.


* 글/사진: 이용한, <은밀한 여행>(랜덤하우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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