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의 오래된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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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오랜 전통과 관습을 지켜가는 곳



천년고도 경주로부터 비스듬히 흘러온 형산강을 뒤로하고 활처럼 휘어진 길이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청량감이 감도는 공기. 벼이삭이 익기 시작한 논배미 위로 가을 햇살이 잘게 부서져내린다.

그 길을 따라가면 옛빛 그득한 기와집과 이엉 마름을 해 얹은 초가를 품에 안은 아늑한 마을이 나타난다. 양동마을이다. 우묵한 골짜기 산자락(설창산)마다 층층이 집이 들어선 모양은 멀리서 보면 마치 조선시대의 양반촌을 그대로 옮겨놓은 영화 세트장 같다.


멋드러지게 줄기가 비틀어진 향단 앞마당의 향나무.


이 곳의 주봉인 설창산 줄기는 마치 말 물(勿)자처럼 뻗어 있는데, 이는 더없이 좋은 명당의 풍수형국이다.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건물은 마을 어귀에 나란히 자리한 향단(보물 제412호)과 관가정(보물 제442호)이다. 향단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부임 시절에 지은 건물로, 원래는 99칸짜리 집이었으나, 현재는 57칸만이 남아 있다.


초가집 앞 텃밭에서 채마를 솎는 할머니(위). 월성 손씨를 대표하는 관가정 건물(아래).


설창산의 두 능선을 각각 차지한 무첨당(보물 제411호, 여강 이씨 종가)과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 월성 손씨 종가)도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종가댁이다. 향단과 무첨당이 여강 이씨네를 대표하는 건물이라면, 관가정과 서백당은 마을의 또다른 성씨인 월성 손씨네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지금도 양동마을은 이 두 성씨의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향단의 나무계단(위)과 짚으로 비가림, 해가림을 한 무첨당의 상청 꾸밈(아래).


이언적은 외가인 손씨 종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태어난 집은 마을에서도 최고의 명당자리다. 지관은 이 곳에서 3명의  현인이 날 것이라 예언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언적이고, 다른 한 명이 손소의 아들 손중돈이었다. 이언적은 조선 초 성리학자로서 지금까지도 문중에서 여강 이씨의 수호신처럼 받들어지고 있으며, 회재의 외삼촌인 손중돈은 이조와 예조 판서를 지내면서 청렴하게 일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관이 예언한 세 번째 인물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셈인데, 곧 태어날 마지막 인물을 다른 문중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양동마을에서는 출가한 딸일지라도 친정에서 출산하는 관습을 지켜가고 있다.


월성 손씨 종가인 서백당 뒤란의 방앗간채와 그 앞의 장독대.


또한 두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정신적 지주인 손소와 이언적을 비롯한 ‘조상 숭배’에 대한 예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씨 문중의 경우 매년 봄과 가을에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옥산서원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모여 향사(享祀)를 지낸다. “향사를 칠 때, 생고기를 올리거든. 돼지도 날거라. 오곡인 쌀, 보리, 밀, 조, 팥도 날거로 올리는데, 혈식군자라 하여 현인은 피를 먹는다는 말이 있는기라.” 회재 선생의 14대손 이원식 씨의 말이다.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은 이언적이 한때 은둔생활을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곳이다. 이 옥산서원에서 10여 분쯤 위로 올라가면 이언적이 낙향해 지은 독락당(보물 제413호)이 있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초가 용마루 이엉.


“낙안읍성이 상인 마을이라카믄, 하회마을은 벼슬아치 마을이고, 양동은 학자 마을이거든. 지끔도 학자 마을로 명맥을 이어가는데, 여기 출신 교수만 해도 90명 정도 될 끼다.” 이원식 씨에 따르면 양동에 있는 150여 가옥의 대부분이 문화재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양동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 많은 문화재 건물도 아닌 마을 뒷산에 홀로 떨어진 정순이 할머니(86)댁의 초가집이다.


양동마을 뒷산을 넘어가 만나는 정순이 할머니 초가.


할머니댁은 본채와 헛간채는 물론 뒷간까지 모두 집줄을 얽어맨 초가 이엉을 얹어놓았다. 본채는 말 그대로 세칸짜리 초가삼간이고, 마루조차 내지 않은 집이지만 둥그스름한 지붕이 주변의 산자락 모양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집이다. “이기 시집 오기 전부터 초가집인기라. 이런기 뭔 구경이라고 행펜없는 것이고마.” 할머니의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초가집-닭장을 이렇게 만들어놓았다(위). 마을 들머리에서 바라본 양동마을 풍경(아래).


양동마을에서 경주까지는 꽤 먼 길이다. 천년고도 경주를 지나 토함산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비단길을 따라 감은사터를 향해 달리다보면 비단마을로 알려진 두산리가 나온다. 마을에서 만난 최혜정 씨(58)에 따르면 마을 전체 30가구 가운데 20가구 넘게 모두 비단을 짠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난 풍경도 최혜정 씨 집에서 마당을 오가며 ‘명주날기’(한 필의 길이와 날실의 올수를 맞추는 일)를 하는 풍경이다.


옥산리 독락당 가는 길의 기와 흙담장.


시어머니인 박영기 할머니(85)는 마당 한 켠에서 날실뽑기(새에 맞게 날실을 뽑아내는 과정)를 하고, 며느리인 최혜정 씨가 그것을 가지고 걸틀을 오가며 날실을 건다. 박영기 할머니는 올해로 69년째 비단짜기를 해왔다고 한다. 16세 때 시집을 온 뒤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비단짜기를 해온 것이다. 최혜정 씨도 어려서부터 비단짜기를 배웠다. 친정에서 어머니로부터 비단짜기를 배워 시집을 왔다.


고부지간이 서로 걸틀을 오가며 명주날기를 하고 있다.


두산리에서 비단을 짜는 대부분의 집에서도 그렇듯 최씨네 집에서도 직접 누에를 키운다. 봄누에(4월에 씨가 나옴)는 여름에 고치실을 뽑고, 여름누에(7월에 씨가 나옴)는 가을에 고치실을 뽑는데, 누에 키우는 일도 여간 정성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비단짜기는 바로 이 누에가 만드는 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실감기(끓인 물에 넣은 고치가 부풀 때 실마리를 뽑아 돌개지에 걸고 돌려 실을 감는 과정)-실내리기(돌개지에 감은 실을 대롱이나 깡통 등에 적당량씩 감는 일)-날실뽑기-날기-매기(풀 먹이기)-올꿰기(바디에 올을 꿰는 과정)-비단짜기의 과정을 차례로 거쳐야 곱디고운 비단이 된다.


안강 5일장에서 만난 짚으로 만든 계란 꾸러미.


때마침 최복출 할머니(72) 댁에 이르자 잘그랑잘그랑 비단 짜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온다.  할머니는 그냥 보통의 비단도 많이 짜지만, 치자나 감물, 홍화 등 천연염료로 염색을 들인 비단도 많이 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머니 또한 16세 때부터 비단짜기를 시작해 50년 넘게 비단을 짜 왔다고 한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보니, 힘들게 지켜온 비단짜기의 내력이 그 안에 다 담겨 있는 것만 같다. 현재 두산리에서는 연간 200여 필(1필=40자, 12미터)의 비단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이는 두산리 사람들의 대를 이어온 솜씨와 비단결같은 마음과 정성이 다 들어 있는 비단이라 할 수 있다.


비단마을 두산리에서 지척에 자리한 감은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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