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양이 사진을 찍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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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 사진을 찍는 이유




여기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폭염 속에서 최근 새끼 한 마리를 잃은,
내가 ‘가만이’라고 이름표를 붙여준 고양이.
축사고양이 시절에도 있는듯 없는듯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가만이’가 되었던 고양이.
축사가 철거되자마자 논다랑이를 건너 돌담집에 둥지를 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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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날마다 나는 담장 위에 올라앉은 가만이네 식구들을 찍었다. 녀석들은 매일 달라지고 있었다.

녀석은 지금 담장 위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생후 한달 쯤부터 당돌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던 아기고양이와 존재감 없이 숨어 있기만 했던 카오스 녀석도 어미의 옆에 다가앉아 ‘그림 같은 풍경’을 돕고 있다. 이 담장 위에서는 모든 고양이가 그림이 된다. 종종 들르는 미랑이가 벽돌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것도 그랬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고등어 녀석(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던 순진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도 어미 옆에 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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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눈을 부릅뜨고 나와 눈을 마주쳤던 이 녀석은 이제 카메라 앞에서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그럴듯한 배경이 한몫을 했다. 담장 위에 앉은 고양이 너머로 펼쳐진 논에서는 초록색 벼가 웃자라 녹색의 배경을 제공한다. 오른쪽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를 에돌아 개울길이 흘러가고, 논배미 뒤로는 단풍나무도 몇 그루 서 있다. 녹색의 배경은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고양이를 돋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가만이와 아기고양이들이 혹은 여리가 이 담장에 앉아 있을 때가 좋았다. 그건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여서 무료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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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에서 녀석들은 그루밍을 하고, 장난도 치고... 먼산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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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거나 말거나 자연스럽게 앉아서 녀석들이 그루밍을 하거나 먼산을 볼 때면, 찰칵거리는 셔터소리가 공연히 미안해졌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담장의 평화와 적막도 잠깐씩 찰칵, 끊기는 듯했다. 녀석들이 담장 위에 올라가 있을 때면 시간도 덩달아 느리게 흘러갔다. 개울길을 달리는 자동차는 바쁘게 지나쳤지만, 구름은 느티나무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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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에 올라앉은 고양이는 외롭고, 담장 밑에 누워 있는 고양이도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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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에도, 보름 전에도 나는 담장 위의 이런 장면을 찍었고, 일주일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같은 곳에 앉은 같은 고양이를 또 찍었다. 아마 내일 똑같은 장면이 펼쳐진다면 나는 똑같이 그 순간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열흘 전의 가만이와 오늘의 가만이는 같은 고양이면서도 같지가 않다. 열흘 사이에 새끼 한 마리가 죽었고, 그래서 녀석은 조금 더 침울해 보인다. 사진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녀석이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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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꼬리, 뒷모습, 적막, 측은함...뭐 그런 것들.

묘생도 인생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멋져 보여도 속은 지옥 같을 수 있다. 고양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고양이 사진을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이야기.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누군가의 눈에는 고양이가 단순히 그저 한 마리의 천덕꾸러기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이런저런 사연과 내력이 얽히고설킨, 더러 숨 막히는 일대기를 살아온, 한편의 역사이고 책이며, 눈물겨운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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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생은 고해야!" 라고 말하는 표정, "어떻게 살까" 라고 말하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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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사연 없는 고양이가 없다. 내가 낱낱의 고양이를 일기처럼 꾸준히 기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땅에 고양이로 태어나 한평생 천대받고 살다가 고양이별로 돌아가는 고양이의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지구별에 이런 고양이가 살다 갔다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데다 대부분은 콧방귀를 뀔게 분명한 고양이 이야기를 저 바람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다. 누군가는 내게 멋진 고양이 사진을 기대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우연히 멋진 순간의 사진을 한 컷 찍을 수는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우연일 뿐이다. 우연히 셔터를 눌렀더니 엄청난 것이 그 안에 있었다는 기적 같은 일은 매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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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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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양이에게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내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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