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띠해 소의 의미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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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에게 소는 어떤 의미인가


2009년 기축년 소띠해가 밝았다. 우리 민속과 문화에서 소는 어떤 의미을 지녔을까. 옛 풍수지리설에 “묏자리가 소의 형국이면 자손이 부자된다.”는 말이 있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인 소를 ‘부’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농사의 신(神)인 신농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소를 제물로 바쳤는데, 당시의 제단을 ‘선농단’이라 했다.

<삼국지> 동이전에도 부여에서 전쟁이 있을 때 소를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민간에서는 과거 집안을 드나드는 대문 위에 소의 코뚜레나 턱뼈를 걸어두었다. 이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함인데, 티베트 등에서 소나 야크의 뿔을 문간에 걸어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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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의 의미와 함께 소는 일상에서 자애의 상징으로도 통했는데, 이는 어미소가 송아지의 온몸을 핥아주는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부터 불교에서는 소를 수행의 상징으로 여겼다. 불가에서 ‘십우도(十牛圖)’는 선(禪)을 추구하는 마음의 수련 과정으로 보았다. 가령 첫 번째 심우는 소를 찾아나서는 것, 두 번째 견적은 소의 자취를 보는 것, 세 번째 견우는 소를 보는 것, 네 번째 득우는 소를 얻는 것, 마지막 입전수수는 궁극의 자리에 드는 것을 뜻했다. 도교에서도 소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표상하는 것으로 유유한 삶의 상징으로 통했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소를 생구(生口)라 하여 다른 가축과 달리 한 식구로 여겼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식구라는 뜻이다. 농경문화의 바탕에서는 소가 없어서는 안될 가축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생구’라 했던 것이다. 사실 경운기가 생기기 이전만 해도 힘깨나 쓰는 일은 모두 소의 힘을 빌어야 했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송아지는 팔아서 농사 밑천 하고, 외양간에 깔았던 짚북세기는 나중에 퇴비로 썼다. 그러니 소를 한 식구로 여겼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소의 노고를 기리는 뜻에서 소에게도 오곡밥을 먹이는 관습까지 있었다. 또한 음력 정월의 첫 축일(丑日)은 ‘소의 날’이라 하여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쇠죽에 콩을 듬뿍 섞어 몸보신을 시켜주었다. 이때 일부 지역에서는 소에게 밥과 나물을 먹여 한해 농사의 흉풍을 점쳤는데,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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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도나 진주에서는 예부터 소싸움을 전통으로 삼았다. 애당초 이 소싸움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전통이 시작되었는데, 일제시대 때만 해도 소싸움이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놀이로 여겨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속놀이였던 씨름에서도 장사가 되면 소를 상품으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12지신 가운데 소띠는 별로 좋은 팔자로 보지 않았다. 소가 일만 하다 죽기 때문에 소띠로 태어나면 마찬가지로 일만 하는 팔자로 보았던 것이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는 외양간의 형태와 위치는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날씨가 따뜻한 중부 아래 지방과 평야지대에서는 소를 헛간 한 켠 외양간에 두어 길렀지만, 날씨가 추웠던 경북 북부와 강원, 중부 산간지대에서는 거개의 집들이 외양간을 부엌에 두었다. 이들 지역에서 소를 밖에 두지 않고 부엌에 두었던 까닭은 그만큼 소라는 가축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산간 마을에서는 산짐승의 습격이 잦았으므로 소를 집 내부에 두어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 날씨가 추운 지역이라 부엌의 아궁이 온기를 외양간 소에게까지 쪼이게 하려는 배려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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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식구처럼 여겼던 소도 언젠가는 팔아치워야 한다. 힘이 다해 농사를 질 수 없거나, 새끼를 낳아 두 마리를 다 먹일 수 없을 때는 둘 중 한 마리는 우시장에 내놓아야 했다. 우시장에 소 팔러 가는 날이면, 소도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여물도 먹지 않고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다 결국 굵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움머 움머 우는 소를 외양간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농부의 마음도 편치 못해 우시장까지 가는 길이 그저 허허롭고 안쓰러워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내 소를 팔고 온 농부의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와 쇠고기 한 근이 들려 있었지만, 마음에는 내내 봉투보다 더 두툼하고 쇠고기보다도 더 묵직한 허전함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소는 그 팔자가 심히 괴롭기만 하다. 비육우로 키우는 한우는 미국산 쇠고기 개방으로 조금씩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우는 고유한 우리의 품종으로 성질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다. 빛깔은 적갈색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적갈색에 검은 무늬가 있는 얼룩배기 칡소도 있었다. 경운기가 생겨나고, 새로운 농기계들이 속속 보급되면서 농촌에서는 이제 ‘일소’조차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실오라기 같은 논두렁길에 덕석을 씌운 암소가 앞장서고, 아직 코뚜레도 하지 않은 송아지가 줄레줄레 뒤따르던 서정적인 풍경은 이제 농촌에서조차 보기 드문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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