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처용은 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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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처용은 외국인이었다?
--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창비)


"돌이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인간사회가 제기하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종교로 선악을 가려내고, 철학으로 의식을 순화하며, 생산으로 부를 축적하며, 교류로 유무상통해왔다. (중략) 그러나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다시피, 그 어느 것 하나도 서로가 닫혀 있는 세계 속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해법으로는 가능하지 못했다." 이 책은 그것의 유력한 대안이 바로 문명의 교류(문명 대안론)로 보고 있으며, 우리 문명 속의 교류된 세계문명을 다루고 있다.

사실 문명이란 "교류하는 과정에서 이질문명 간의 접촉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접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접변에는 서로 다른 문명 요소가 건설적으로 조화되어 일어나는 융합과 피차가 아닌 제3의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는 융화, 그리고 일방적 흡수인 동화의 3가지 형태가 있다" 이 중 융합만이 조화로운 순기능을 해내며, 우리 문화의 꽤 많은 것들이 외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우리문화로 자리매김한 것들은 모두 이 융합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다양한 문명사적 비교와 교류와 영향론을 실례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때로는 수긍이 가는 점이 있지만, 때로는 고개가 갸웃거릴 때도 있다. 그가 첫번째로 거론한 단군신화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비교나 고구려 건국신화와 로마의 건국신화의 비교에 대해서는 별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는 우리 문명과 인물, 문화현상을 외래의 그것들과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유사점을 찾고 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빗살무늬토기-북유럽의 '캄케라믹', 고인돌-돌멘, 세형동검-유라시아 안테나식 검, 신라유리 새머리 물병-로마의 봉수병, 신라금관-흑해의 금관, 백제금동대향로-서역의 향로, 무령왕릉-중국의 전축분, 석굴암 석굴-키잘 석굴, 신라 불교미술-간다라 미술 등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또한 책에는 교류와 관련된 인물들도 등장한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찾아 우리나라를 찾은 서복을 그는 한중교류의 스타트를 끊은 인물로 보고 있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가락국 왕의 배필로 시집을 온 인물이다. 한국의 첫 세계인으로 저자는 혜초를 꼽는다. 혜초는 서역을 기행하고 나서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인물로 유명하다.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고원을 비롯해 다섯 차례나 서역원정을 단행했고, 장보고는 9세기 신라를 비롯 동북아시아의 당, 일본을 아우르는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한편 우리나라 귀화인들의 토착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을 비롯해 연안 이씨, 덕수 장씨, 경주 설씨, 충주 매씨 등 우리나라의 총 275개 성씨 중 귀화한 성씨가 136개나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화포와 천리경, 자명종, 천문관측의기, 역산법 등은 서학을 수용한 것이며,수박과 수수, 오이, 호두, 포도 등은 고려 때 서역에서 들여온 것이다.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고추, 담배, 땅콩 등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퍼져나간 것이지만,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 책이 밝힌 것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경주 괘릉의 무인석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중앙아시아나 아랍식 터번을 쓴 서역인상으로 보았다. 흥덕왕릉의 무인석도 마찬가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신라 향가에도 등장하는 처용의 정체를 외국인으로 본 것이다. 아마 이도 아랍인이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나는 신라시대의 기독교 유물이 발굴된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불국사에서 출토된 신라 성모마리아소상과 십자무늬장식이 바로 고대 동방 기독교 유물이라는 것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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