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길고양이 해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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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해방구

 

 

길고양이 해방구가 있다면, 이곳이다.

대모네 식구들이 노니는 개울이란 곳.

인간의 비난이나 손가락질이 없으며, 아예 인간의 시선이 가 닿지 않는 곳.

오로지 길고양이들만의 복된 영역.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놀고먹고 쉬고 자고 우다다에 그루밍에 배설조차 자유로운 곳.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고양이만의 화장실. 개나리와 벚꽃이 피어 있는 배경이 아름답다.

 

내가 처음 대모네 식구들을 개울에서 만난 것은 지난 3월 초순이다.

녀석들은 돌담집 인근의 논배미 급식소나 논두렁에서 밥을 먹고 나면

종종 고랑에 난 배수구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 배수구 너머의 세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배수구 속을 들여다보고서야 나는 녀석들이 단지

그곳을 은신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멋진 배경을 뒤로 하고 모래언덕에서 노니는 고양이들.

 

녀석들은 하나 둘 배수구 속으로 들어가

햇볕이 환한 건너편의 세상으로 뛰어내리는 거였다.

배수구 건너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었던 거다.

나는 그 세계가 궁금했다.

하지만 도로에서는 내 키보다 높은 2미터 이상의 도로벽으로 인해 개울가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개울이 있다는 거야 이미 진즉에 알았지만,

도로벽 너머의 개울을 일부러 살펴본 적은 없었다.

당장에 나는 커다란 돌을 몇 개 쌓아올려 고양이들이 건너간 도로벽 너머의 개울을 살펴보았다.

아, 거기엔 또 하나의 고양이 세상이 있었다.

 

 모래밭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소미, 재미, 꼬미(위). 모래밭에 엎드려 그루밍중인 재미(아래).

 

대모는 개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농수로관 위에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었고,

꼬미와 재미는 개울로 내려가 금빛으로 부서지는 황혼녘의 냇물을 마시고 있었다.

소미는 이미 물까지 다 마셨는지, 배수구 아래 너럭바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동안 녀석들은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나면

배수구를 지나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디딤돌 위로 올라가 깨금발을 하고 개울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왕이면 녀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곳을 급식소로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도로벽이자 제방인 담장의 높이가 6미터 남짓 되는 바람에

위에서 사료를 부어주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곤 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다다를 할 수 있는 곳(위). 맘 편히 하늘에 뜬 구름을 감상할 수 있는 곳(아래).

 

결국 나는 급식소에서 100여 미터는 위로 올라가 제방의 높이가 비교적 낮은

약 3미터 정도의 담장을 내려뛰어 다시 100미터를 내려온 뒤

배수구 앞에 이르러 간이 급식소를 차렸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곳은 놀고먹고 싸고 자고 쉬고 고양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길고양이 해방구가 되었다.

약 한달쯤 지나서 급식소를 좀더 위쪽의 배수구 앞쪽으로 옮기긴 했지만,

해방구로서의 면모는 변함이 없었다.

녀석들은 한번도 성공한 적 없는 새사냥을 수시로 즐겼고,

농수로관 위에서 평균대 놀이를 하는가 하면,

납작한 돌멩이를 베개 삼아 낮잠도 잤다.

한낮의 볕이 뜨거워지면 수로관 그늘에서 몸을 식히기도 했고,

물길을 거슬러 개나리꽃이 한창인 개울가를 산책하기도 했다.

 

 개울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점프를 하고 있는 재미(위). 반짝거리는 물살 위로 점프 준비 중인 꼬미(아래).

 

어느 날엔가 나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위쪽 배수구 아래서 밥을 먹고 난 재미, 소미, 꼬미가

배수구 앞 모래밭에서 한참이나 우다다와 싸움장난을 치더니

너럭바위 급식소 위쪽의 모래언덕으로 올라가 볼일을 보는 거였다.

볼일을 보는 게 뭐 그리 인상적이냐, 고 하겠지만,

그날은 배경이 달랐다.

개울 저쪽의 제방 위엔 줄지어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멀리 벚꽃도 몇 그루 피어서

개울가의 배경이 온통 꽃천지였던 것이다.

 

 개울 건너편 갈대숲에서 쉬고 있는 꼬미.

 

꽃향기라도 날것 같은 꽃천지 배경을 뒤로 하고

녀석들은 냄새 나는 뒷일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그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고양이 화장실 같았다.

고양이의 볼일조차 그날은 낭만적이었다.

꼬미와 재미는 종종 개울에 놓인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서

건너편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석양의 점프는 숨이 멎을듯 아름다웠고,

공중부양한 고양이는 내 눈에서 물고기처럼 반짝거렸다.

 

 개울가 돌멩이를 베고 잠이 든 꼬미.

 

허구헌날 꼬미는 건너편 개울가 갈대숲으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아예 한동안은 꼬미가 이 숲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기도 했다.

대모가 소미와 재미를 데리고 둥지로 떠난 뒤에도

꼬미는 혼자 남아서 이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얼마 전 며칠 동안이나 장마같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이곳 갈대밭을 영역화 하려는 꼬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신에 꼬미는 비가 많이 오면 개울가 갈대밭이 물에 잠긴다는 교훈을 얻었다.

 

 길고양이를 해방구로 연결시켜주는 배수구 통로.

 

교훈을 얻은 것은 꼬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도 비가 많이 오면 배수구에 물이 흘러들고

개울물도 불어서 개울가에서 맘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대모네 식구들의 개울 사랑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녀석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물론 아직은 모내기를 위해 논에다 물을 가두는 중이어서

배수구로 흘러드는 물이 심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장마철이 되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길고양이 해방구가 오히려 길고양이 피해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모든 해방구가 그렇듯 길고양이 해방구도 허망한 희망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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