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스 고양이를 보는 집냥이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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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고양이를 보는 집냥이의 시선




이사를 온 뒤, 지난 4개월 동안 먹이를 주었던 노랑이에게
‘바람이’란 이름을 붙여주면서
녀석은 도리어 구름처럼 우리집에 머물기 시작했다.
달포쯤은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요즘에는 녀석이 거의 하루 왼종일 테라스 밑에 앉아 있다.

어떤 날은 삼시 세끼를 우리집에서 해결하고,
수돗가에 놓아둔 대야마저 전용 물그릇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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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듣보잡이 내 밥을 축내는 거야!" 테라스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바람이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실의 랭보.

그러나 이 녀석 여전히 마음만은 열지 않고 있다.
물론 이제는 내가 가까이 다가서도 도망을 치지는 않지만,
내 앞에서 애교를 부리지도, 그루밍을 하지도,
손등 인사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것을 기대하고 먹이를 준 것은 아니지만,
곰살갑지 않은 녀석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녀석에게도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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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일단 주린 배를 채우고 보는 바람이.

그런데 그렇게도 무뚝뚝한 녀석이 요즘에는 웬일인지 테라스까지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은 먹이주는 것을 잊고 방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밖에서 먹이를 달라고 냥냥거릴 때도 있다.
녀석이 테라스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약 보름 전의 일이다.
보름 전 먹이그릇에 개미가 들끓어
그것을 테라스에 올려두었더니
녀석은 그 소심한 성격에 큰맘 먹고 테라스까지 올라와 먹이를 먹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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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테라스에 앉아 있는 노랑이를 보는 랭보(위)와 테라스에서 거실의 랭보를 바라보는 바람이(아래)의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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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거실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랭보였다.
랭보는 거실 밖에 낯선 고양이가 나타나자 귀를 마징가처럼 세우고,
꼬리털까지 곤두세우고는 바람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랭보 입장에서는 바람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런 침입냥에게 나는 사료까지 퍼다주고 있었으니,
랭보가 못마땅하고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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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랭보를 흘끗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라스에 앉아 식빵 굽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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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가 사료를 먹는 동안
랭보는 안절부절 못하고 거실 창문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계속해서 으르렁, 하악거렸다.
그날 이후, 바람이는 먹이그릇을 테라스 아래 놓아두었는데도
스스럼없이 테라스로 올라오곤 했다.
거실 안에 랭보와 랭이, 두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을 했다.
녀석은 테라스 위로 올라와 가끔 거실 창문을 통해
실내의
랭보와 랭이를 훔쳐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랭보와 랭이는 잔뜩 긴장을 해서는 창문을 경계로 대치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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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앞 발코니에서 풍산개 두보의 사료포대를 넘보던 바람이. 두보가 뒤에서 "쟤 좀 어떻게 해봐요!"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한번은 작업실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랭보와 바람이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하악거리고 있었다.
내가 잠시 커피를 타러 주방에 간 사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밖에서 으르렁거리던 바람이가 방충망 안에 앉아 있던 랭보를 향해 뛰어올랐던 모양이다.
커피를 타는 사이 으르렁 툭탁, 싸우는 소리가 들려 급히 작업실로 들어가보니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렀는지
랭보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 색색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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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관 앞으로 다가서자 슬금슬금 계단을 내려가는 바람이.

랭보 또한 소싯적에는 길고양이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영역을 넘보는 길고양이에 대한 동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랭보에게 그건 영역을 지키기 위한 본능의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이래저래 바람이가 테라스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랭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바람이의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는 건 뒤란을 지키는 풍산개 ‘두보’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바람이가 현관의 발코니로 올라와 바깥에 둔 두보의 사료포대를 넘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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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롱~!" 계단에 앉아 잠시 입맛을 다시는 바람이.

사료포대를 묶어두긴 했지만, 바람이는 종종
그것을 입으로 헤쳐 두보의 사료를 강탈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두보는 컹컹 짖으며 바람이의 행동을 나에게 고발했다.
그러나 랭보와 두보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나는 바람이에 대한 급식을 중단할 수가 없다.
언제나 생존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는 쪽은 바람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바람이와 랭보, 바람이와 두보의 사이가
지금의 냉전구도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 고양이의 사생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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