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서브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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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서브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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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 밤이 오면
남도여관 뒷골목에 노란 서브마린 불빛이 켜진다
시멘트 벽돌의 몰골을 그대로 다 드러낸,
겨우 창문을 통해 숨을 쉬는지는 알 바 없는
서브마린에 불이 켜지면
벌어진 아가미 틈새로 하얗고 비린 담배연기가 흘러나온다
세상의 험한 욕이란 욕도 거기서 다 흘러나온다
갈 데까지 간 여자와 올 데까지 온 남자가
곧 죽을 것처럼 한데 뒤엉킨
서브마린에서는 때때로 항구의 악몽과 통곡이
외상으로 거래되고
바다의 물거품과 한숨이 아침까지 정박한다
지붕 위에선 밤새 풍랑이 일고
지붕 아래선 끈적한 울음같은 것들이 기어간 흔적이
수심에 잠긴 뻘밭 같기만 한데,
밤 깊은 서브마린에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세상은 다 끝난 것만 같은데,
아침이면 다들 멀쩡하게 바다로 출근하는 것이다
죽을 것처럼 살아서 거짓말처럼 철썩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나면
어김없이 서브마린에 노란 불빛이 켜지고
항구의 낡은 사내란 사내 거기서 다 술마신다
저렇게 버려진 잠수함으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지만,
한번 시동 걸린 사내들은 어디든 간다
목포의 눈물에서 흑산도 아가씨까지
거기서 술을 팔든 몸을 팔든 내 알 바 없지만,
남도여관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나는
바닥의 절박한 生을 끌고 가는 한 척의 슬픈 잠수함을 본다.


- 이용한 시집 <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 중에서

안녕 후두둑 씨 상세보기
이용한 지음 | 실천문학사 펴냄
방 안을 접수한 수상한 당나귀, 술에 취한 후두둑 씨를 잡아당기는 긴수염고래 등 기이한 변종과 변질된 사물을 통해 시인은 문법과 기표의 교묘한 전위를 보여주며, 시간과 공간이 뒤엉키는 불가능한 배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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