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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23 걷고 싶은 길, 비밀코스 Best 5 10
걷고 싶은 길, 비밀코스 Best 5
때때로 차를 버리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오로지 발바닥으로 흙과 교감하며, 길의 질감을 느끼고 싶은 길이 있다. 차를 타거나 속도를 내서 지나가면 보지 못할 것들을 길 위의 보행에서 나는 보곤 한다. 그것이 가끔씩 내가 차를 버려두고 굳이 흙길을 밟아보는 이유다. 그 길 중 비밀코스 몇 곳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해야 한다.
1. 정선 단임골 가는 길: 앞산뒷산 빨랫줄 매고 사는 곳
예나 지금이나 정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두메산골로 통한다. 오죽하면 ‘앞산뒷산에 빨랫줄을 매고 산다’는 말이 있을까.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단임골은 이 말이 정말로 통하는 곳이다. 길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이십 리 넘게 이어져 있다. 단풍나무가 많아서 단임골. 단임마을은 이 단임골 계곡의 비경이 끝나는 곳에 앞산뒷산 산자락을 지붕 삼아 둥지를 틀고 있다. 마을의 첫집은 바로 귀틀로 된 너와집. 그러나 지붕 위에 푸른 천막을 씌워놓아 더 이상 너와집이라 할 수 없는 너와집이다.
너와집을 벗어나 한참을 더 올라가자 동네 반장댁인 심상복 씨네가 나온다. 마당에는 장작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뒤란에는 토종벌통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내가 찾아가자 그는 손님 접대를 한다며 귀한 벌꿀술을 내왔다. “올핸 벌이 잘 안됐어요. 꿀 못 딴 통이 절반 넘어요. 솔잎혹파리약을 쳐서 그런가봐요. 이 약이 워낙 독해서 수간주사 한번 치고 나면 주변에 뱀이고, 해충이 싸그리 없어져요.” 그에 따르면 단임마을에는 모두 아홉 가구에 14명의 주민이 산다고 한다. 마을이 해발 700미터쯤에 자리잡고 있어 겨울이면 날씨가 대관령과 비슷한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간단다. 그러니 겨울에는 오로지 나무하는 게 일이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집에는 보기 드문 성주(집안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의 신체가 부엌에 남아 있다. 이 곳의 성주는 무명 실타래와 한지를 접어 신체를 만들었는데, 부엌 대들보 아래 모셔져 있다. 아마도 처음 이 집이 지어질 무렵에 모신 듯하다. 본래 성주는 집을 새로 지을 때 대들보 아래 모시며, 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모시기도 한다. 이 마을에 북에서 내려온 귀순자 이영광 씨도 산다. 약 40여 년전 북에서 내려온 그는 춘천 쪽에 살다가 20여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여긴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부딪칠 염려가 없잖아요. 여기 자연이 너무 좋으니까, 마음이 편해요. 만약 여기까지 오염이 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에게는 어쩌면 이 곳 단임마을이 삶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2. 울릉도 알봉분지 가는 길: 원시의 숲에 잠기다
울릉도 북면 해안은 비경의 연속이다. 우산국 시절의 도읍지인 현포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신기하게 생긴 공암(일명 코끼리 바위)이 조금씩 코끼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천부에서 섬목으로 이어지는 해안에는 딴방우(딴바위), 삼선암, 깍새섬, 죽도(유일한 유인도)가 차례로 절경을 드러낸다. 그러나 북면의 진정한 비경을 보고자 한다면, 나리분지와 알봉분지를 놓쳐서는 안된다. 나리분지와 알봉분지는 성인봉(984미터)과 주변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빙 둘러싼, 움푹한 곳에 자리해 있다. 이 곳에는 조선시대 개척민 1세대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투막집도 여러 채 남아 있다.
10년 전에 비해 나리는 많은 것이 변했다. 꽤 많은 집들이 나리를 떠났고, 남은 집들은 대부분 호구지책으로 식당이나 민박집 간판을 내걸었다. 나는 승합차를 함께 타고 왔던 관광객들이 건네는 막걸리 한 잔과 파전 한 조각을 얻어먹고, 혼자서 성인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전 10시였고, 알봉분지를 거쳐 성인봉을 넘어가 나는 도동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나리에서 알봉분지로 이어진 길은 숲을 음미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길이다. 숲에서는 내내 나무를 두드리는 딱따구리 소리가 났다. 심지어 20여 미터 앞에서도 딱따구리는 고목을 쪼아대고 있었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울도큰오색딱따구리다.
알봉분지에서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은 신령수 지점까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신령수를 지나면서부터는 가파른 경사가 6~7부 능선까지 계속된다. 가파른 경사가 한풀 꺾이는 지점부터는 이제 정상부까지 성인봉 원시림지대(천연기념물 제189호)가 내내 이어진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아무렇게나 뻗어올라간 가지와 그 가지를 휘감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치렁치렁 뻗어나간 넝쿨이 얽히고 설킨 천연한 원시의 숲! 해가 들지 않을 정도로 컴컴한 활엽수 그늘에는 비밀의 화원처럼 이끼의 숲과 고사리숲, 털머위밭이 펼쳐져 있다. 때마침 단풍은 절정에 이르러 원시림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빛깔의 잎들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그동안 숱한 단풍을 보아 왔지만, 이토록 아찔한 단풍은 처음이다.
3. 제주 중산간 제동목장 삼나무 숲길: 제주도에 이런 길이 있었나?
산은 험하고 바다는 사납다. 옛 사람들이 제주를 두고 표현한 말이다. 이는 아마도 화산섬인 제주가 지형적으로 높은 한라산을 품고 있는 데다 오름이 많고, 언제나 바람이 심해 고요한 바다를 만나기 어려운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말일 터이다. 제주의 중산간은 대부분 목장지대라 할 수 있다. 지도에 표기된 목장만도 10여 개가 넘고 표기되지 않은 목장까지 합치면 20여 개가 넘는 목장이 중산간에 포진해 있다. 이들 목장은 거개가 말목장인데, 이들 말목장의 풍경은 제주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기도 하다.
특히 목장이 많이 몰려 있는 1112번 도로와 1118번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그리고 좀더 운치있는 목장의 풍경을 감상하는 방법은 주도로를 벗어나 목장의 경계를 따라 들어선 삼나무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거나 트레킹을 즐기는 일이다. 제동목장이나 건영목장 인근에는 정말 영화에나 나올법한 비밀스런 삼나무길이 숨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길의 들머리에서 길의 끝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나무길이 펼쳐진 곳도 있다. 한국에도 이런 길이 있나, 하고 눈을 의심하게 되는 길이 이 곳이다.
제주 중산간에는 아름다운 숲을 지닌 마을도 더러 만날 수 있다. 한림읍에 자리한 명월리도 그 중 하나인데, 마을에는 50년생에서 500년생까지 50여 그루가 넘는 팽나무가 마을의 계곡을 따라 100미터 넘게 펼쳐져 있다. 이 숲에는 과거 선비들이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누던 명월대가 남아 있어 그 운치를 더해준다. 명월리가 팽나무 군락지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납읍리는 난대림 군락지라 할만하다. 이 곳에는 1만 평에 이르는 땅에 모두 200여 종의 난대림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옛날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던 금산공원도 마을 한가운데 터를 잡고 있다.
4. 삼척 황새터 가는 길: 하늘 아래 첫동네
산첩첩 물중중 삼척에 가을빛 완연하다. 잎 달린 나무란 나무들 모두 붉고 노랗게 물들어 유난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린다. 산비탈 뙈기밭에는 때늦은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손이 남은 할머니는 곶감을 깎아 치렁치렁 추녀 끝에 매단다. 육백산(1244미터)이 솟아 있는 황조리는 삼척의 전형적인 산촌의 모습을 띠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황새가 많아 황새터, 황새밭이라 불려온 황조리는 덕지기, 가마실, 방우리, 성하밭, 황새터 등 여러 자연마을이 육백산 골짜기를 따라 흩어져 있는데, 특히 성하밭과 황새터는 해발 800여 미터 안팎에 자리잡고 있어 그야말로 하늘 아래 첫동네라 할만하다.
현재 성하밭에는 여섯 가구, 황새터에는 한 가구만이 외로운 산중생활을 하고 있다. 황새터에도 과거에는 10여 가구 정도가 살았으나, 마을의 8만여 평 부지에 삼척대 캠퍼스 조성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 그 옛날에는 화전민정리사업으로 부대기꾼들이 쫓겨나더니 이제는 대학 캠퍼스 조성이 남은 사람들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에는 빈집이 드문드문 남아서 옛 산중마을의 추억을 뭉게뭉게 들려주고 있다.
무엇보다 황새터 오르는 길은 육백산의 단풍 능선과 어울려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게만 보인다. 여기서 한참을 머물러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황새터와 덕지기 중간쯤에 자리한 성하밭도 올라가는 길이 엄청난 비탈길이다. 집이 있을 것같지 않은 산꼭대기 아래 여섯 채의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성하밭에 오르자 황조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온통 산이다. 산자락마다 단풍은 곱게 들어서 산중의 싱숭생숭한 나그네의 발길만 무겁게 한다.
5. 울진 왕피천을 따라서: 자연 그대로의 생태천국
왕피천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왕피리를 구불구불 거쳐 성류굴을 지나 동해로 빠져나가는 총연장 60킬로미터가 넘는 이 땅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은밀한 하천이다. 왕피천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지만, 그 어떤 길도 왕피천의 일부 구간만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제한된 길일 뿐, 대부분의 구간은 사람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비밀의 구간으로 남아 있다. 이런 접근의 어려움은 오늘날까지 왕피천을 원시 그대로의 자연환경으로 남겨 놓았고,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노력이 보태져 2006년 국내에서 가장 큰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왕피천을 끼고 있는 왕피리는 울진에서 가장 궁벽한 곳으로 통한다. 10년 전만 해도 서면 삼근리에서 왕피리로 넘어가는 박달재는 포장이 안된 원시림 속의 비포장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까지 시멘트 포장이 된 산복도로가 이어져 있다. 옛날에는 왕피리가 워낙에 오지 중의 오지여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는 바람에 결국 빈 마을이 되고 말았다. 이 곳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생태농업을 실천하는 생활공동체 한농복구회 사람들이 이 곳으로 집단 이주를 시작하면서 왕피리는 이제 600가구가 넘게 사는 대규모 마을로 변모했다.
왕피리는 접근이 어려울지언정 골짜기 안은 제법 너른 터를 이루고 있어 옛날에도 한천, 임광터, 동수골, 속사, 시목, 뱀밭, 햇내, 시리들 등 10여 곳이 넘는 자연마을이 있었다. 본래 왕피리라는 이름은 왕이 피난을 왔던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곳 왕피리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왕피리 임광터가 바로 임금이 머물던 곳이고, 박달재를 품은 통고산도 공민왕이 통곡을 하며 넘었다고 생겨난 이름이란다. 왕피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박달재를 넘어 삼근리로 넘어가는 것이 가장 편하지만, 길은 본부마을에서 매화리로 넘어가는 길이 훨씬 운치가 있다. 사실 왕피리의 비상로 노릇을 하는 이 길은 한농복구회 본부가 있는 본부마을에서 산을 타고 40리나 이어져 있고, 40리 내내 비포장길이며, 산비탈의 금강송(황장목) 군락지가 은밀하게 펼쳐진 천연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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