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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6 하수구 속 길고양이가 궁금하다 23

하수구 속 길고양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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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길고양이가 궁금하다

 

고양이에겐 그들만의 비밀통로가 있다.

이를테면 하수구이거나 배수구 같은 것.

어느 날 나는 논고랑에서 개울가로 이어진 배수구 속에서

이따금 뒤돌아보며 눈빛 광선을 쏘아보내는 ‘지하생활묘’를 만났다.

바닥까지 내려간 묘생의 언더그라운드.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들을.

캄캄한 배수구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두 개의 별빛은

한발 한발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떤 날은 꼬미가, 또 어떤 날은 재미가,

소미와 대모가 나란히 그 속에 웅크려 있기도 했다.

봄이 되면서 대모네 식구들은 논고랑에서 개울 쪽으로 이어진 배수구를

은신처이자 휴게실로 사용했다.

 

 

 

낮 시간의 대부분을 녀석들은 이곳에서 보냈다.

녀석들의 급식소 또한 나는 개울가 배수구 아래쪽으로 옮겼다.

이곳은 고양이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이었다.

도로 쪽에서는 아예 개울이 보이지 않았다.

2미터 정도의 도로벽이 담장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담장이자 제방은 개울 쪽에서 보자면

6~7미터는 족히 되는 높은 벽이었다.

 

 

 

처음에 나는 도로 쪽에서 돌을 몇 개 받쳐놓고 그곳에 올라서

녀석들이 개울에서 노니는 모습을 구경했더랬다.

사료도 처음 몇 번은 그렇게 받침돌에 올라 아래쪽으로 부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에서 사료를 부어주자 사방으로 사료가 튀어

더러는 모래와 자갈밭으로 사료가 떨어지곤 했다.

제대로 사료를 주려면 개울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7미터에 이르는 제방을 밧줄 타고 내려갈 수도 없고.

결국 나는 녀석들이 주로 머무는 배수구로부터 100여 미터는 위로 올라가

그나마 제방이 3미터 남짓 되는 지점에서 개울 쪽으로 뛰어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거기서 다시 100여 미터를 걸어 내려오는 거다.

 

 

 

이렇게까지 해서 급식소를 옮길 이유가 있을까?

최근 들어 이 동네에서는 무럭이 3남매와 노을이가 실종된 데 이어

당돌이와 카오스 녀석마저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것이 한 사람에 의한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바,

최대한 쥐약을 놓는 곳으로부터 녀석들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었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3미터의 제방을 내려뛰어 이 개울까지 와서 쥐약을 놓지는 않을 것이므로.

거의 매일같이 나는 3미터의 높이를 내려뛰어야 했지만,

이 개울이야말로 녀석들의 해방구와도 같았다.

 

 

 

녀석들은 마음 놓고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바위 위에서 그루밍을 하고

햇살이 따가워지면 배수구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밥을 먹을 때에도 인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먹고 자고 쉬는 것이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배수구 속의 고양이 사진을 찍는데 유리했다.

굳이 바닥에 납작 엎드릴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 손쉽게 배수구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며칠에 한번 꼴로 배수구 속의 고양이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고양이 해방구로 이어진 비밀통로.

녀석들은 그 안에서 레지스탕스처럼 앉아 있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녀석들은 그 안에서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그루밍을 하고, 낮잠을 자고, 식빵 굽는 자세로 구멍 입구의 카메라가 치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까맣게 나는 모르고 있었다.

녀석들에게 이런 비밀공간이 있었으며,

이곳에서도 엄연히 은밀한 묘생이 존재했다는 것을.

 

 

 

사실 고양이의 묘생 자체가 미스터리이고,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빙산의 일각이긴 하다.

그 빙산의 일각을 보고 나는 고양이를 좀 안다고 젠체했던가.

인간의 눈을 피해 고양이들은 어쩔 수 없이 언더그라운드가 되었다.

이 땅의 길고양이는 인간을 피해 숨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학대가 심할수록 녀석들은 점점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세상의 밝은 곳으로 나와서 인간에게 몸을 맡기고 인간과 함께 자유롭게 숨쉬는

고양이의 사례는 그저 딴 나라의 본보기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마을에서 고양이 해방구와도 같은 개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러나 얘들아!

이 배수구는 언제까지 안전한 공간이 아니란다.

장마철이 오면 이곳은 틀림없이 물난리가 날 텐데,

그럼 또 너희들은 어디로 피신을 갈 테냐.

너희는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 배수구 속 길고양이를 찍는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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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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