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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3 고비사막에 오르다 2

고비사막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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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고비 고비를 받아적다



사람들을 태운 낙타가 고비의 사구를 오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 게르문을 열자

곧바로 사막이 펼쳐진다.

아침부터 숨이 턱 막힌다.

아침 햇살은 두루뭉실한 모래언덕에 부딪쳐

눈부신 황금 물결을 이룬다.

내 눈엔 벌써

닿지도 않은 고비가 그렁거린다.



이른 아침의 고비. 초원의 풀을 뜯는 낙타의 등 너머로 고비의 사막이 펼쳐져 있다.


고비고비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는 고비를 인생의 고비에 비유하고,

누군가는 ‘고비의 고비’를 이야기한다.

고비의 비유는 이제껏 너무 많아서

어떤 비유도 참된 고비를 수사하지 못한다.



고비의 사막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곡선과 무늬. 시간의 예술.


가령 내가

고비는 ‘거대한 물고기 무덤’이라거나

‘고래의 언덕’이라고 말한다면,

희박한 수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오랜 옛날 분명히 바다밑이었고,

물고기와 고래의 거주지였다.

세월이 지나 공룡에게 거주지를 내줄 때까지

고비는 엄연한 바다였다.



홍고린 엘스에서 만난 아침 풍경. 언니가 자전거를 끌고 나가자 동생이 발가벗고 울며 따라나선다.


공룡학자들에게는 고비가 매력적인 공룡의 화석지로 통한다.

고비에서 발견된 수많은 공룡뼈 화석이

전세계 박물관으로 실려나간다.

몽골 정부에게 지금 중요한 건,

공룡이 아니라 공룡같은 세계화에 뒤쳐지지 않는 것이다.

몽골을 지켜온 근본이 아니라

황무지를 뒤엎을 자본이다.


고비 사막에 뜬 아침의 낮달.


여행자는 그저 여행하고 나면 그뿐.

몽골인과 유목민의 삶이 한결 윤택해지기를

여행자가 바라긴 하는 걸까.

근친혼으로 장애우가 유난히 많은 몽골인의 족보를

여행자가 과연 이해하려고 하는 걸까.

나 또한 저 사막을

탐험가처럼 갔다가 오면 그 뿐인 것이다.



게르촌의 바람개비. 이것으로 발동기를 돌려 전력을 얻는다.


바다가 늪이었다가 사막이 된 것이

자연의 진화인지 퇴화인지,

아니면 지각의 윤회인지는 여행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여행자의 목적은

‘시간의 무덤’인 저 사막에

발목을 내리는 것이고,

왔다 갔다는 증거로 사진을 박는 것이다.

나 또한 왔다 가는 여행자의 비극과 운명을 절감하리라.



저 작은 세면통에 가득 물을 부으면 하루종일 게르 주인과 여행자가 쓰고도 남는다.


아침이 되자 게르 한 편의 세면통에서는

눈물겨운 풍경이 연출된다.

기껏해야 2리터쯤 물이 담긴 세면통의

아랫꼭지를 누를 때마다

한방울 한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고,

게르 주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몽골인은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 세수도 하고 목까지 닦는 것이다.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향하는 여행자의 뒷모습.


사실 몽골에서는

우리가 먹는 2리터 생수 한 통이면 온가족이 세수하고

남겨서 이튿날까지 세수할 분량이다.

어차피 이 세면통은 여행자를 위한 것이다.

고비의 원주민은 세수하는 것조차 사치에 가깝다.

나도 세면통으로 가

현지인이 하는 모양으로 물방울을 받아 세수를 한다.

겨우 한 모금 정도로 세수를 마치고 나자

느닷없는 모래돌풍이 세수한 내 얼굴을 덮치고 간다.

고비에서 굳이 씻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내가 방금 경험한 것이다.



사막에서 내려오고 있는 낙타들.


지금까지의 시간은 덜컹거렸지만,

이제 사막에서의 시간은 서걱이고, 미끄러질 것이다.

서울에서 가져온 쌀로 대충 밥을 해먹고

함께 온 일행들과 낙타를 탄다.

낙타 없이는 가기가 어려운,

바퀴도 발목도 푹푹 빠지는 길.

낙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도 덩달아 기우뚱거린다.

기우뚱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낙타의 가르침이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사막.


이제 사막은 아침의 황금빛을 벗어버리고

흰색에 가까운 모래빛으로 바뀌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구의 곡선무늬와 물결무늬는

다가갈수록 선명하고 분명해진다.

사막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낙타와 한몸이 된다.



나는 기우뚱한 낙타 위에서 간신히 사막으로 가는 내 그림자를 찍었다.


그리고 드디어 낙타의 느린 걸음이

나를 사막에 내려놓는다.

난생 처음 나는 낙타의 등에서 내려

사막의 모래를 발목으로 느낀다.

한발한발 디딜 때마다 발목이 잠긴다.

이런 사막에 빠지기 위해

나는 왔다.



사막에 도착한 여행자들, 고비의 언덕을 오르다.


내가 보려 한 것은 애당초 사막이지,

사막의 형식이 아니다.

비유로서의 사막이 아닌,

발목이 감지하는 사막.

사구의 꼭대기로 겨우겨우 발을 옮기면서

나는 이 낯선 행성에 ‘던져진 나’를 본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던져진 것’과 ‘던져졌다고 느끼는 것’의 차이를

나는 발바닥을 통해 느끼고 싶었다.



모래언덕에 올라 남고비의 풍경을 바라보면, 숨이 턱 막힌다.


누군가는 고비에서 모래알만한 존재감을 안은 채 돌아가고,

누군가는 낙타의 눈에 비친 또다른 고비를 발견한다.

그러나 사막에서 내가 본 것은

사막의 궁륭에 뜬 낮달과

맹렬한 직사광선과

사막의 무늬를 제압하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사막의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싹을 틔운 갸륵한 새싹들이다.

‘던져진 나’를 본 것은 어쩌면

던져졌다고 느끼는 어떤 정조일 뿐이다.



이 척박한 고비사막의 한가운데에도 새싹이 자라고 있다. 무서운 생명력.


저 사막을 횡단할 것인가, 는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에겐 고비에 와서 사막을 느끼는 것이 간절했고,

모래의 진원지를 밟아보는 게 절실했다.

사구의 꼭대기에 올라

한참을 말없이

나는 모래의 시간을 본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고비에 올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비가 아니더라도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나는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늘 내 앞의 광경은 나에게

마지막 풍경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우리는 두번 다시 서지 못할 것이다.


낙타를 타고 나는 다시

사막을 빠져나간다.

고비에 와서 결국 고비를 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비를 넘어야 할 이유가 내게는 없다.

고비를 만나서 고비를 떠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고비에 대한 예의다.

다만 문장이 될 수 없는 가슴은

오래오래 사막을 받아적을 것이다.

먼 훗날 나는

‘고비에 떨어진 몽골리스트’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먼 훗날의 얘기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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