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에 고양이'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0.05.18 고양이가 보리밭으로 간 까닭은? 33
고양이가 보리밭으로 간 까닭은?
이웃마을 축사가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그곳에 살던 축사고양이는 졸지에 갈 곳이 없어졌다.
아마도 평생을 머물렀을 둥지도 사라졌고
그들만의 놀이터이자 은신처도 사라져버렸다.
축사가 철거되는 동안 축사고양이는
목초지로 조성한 축사 앞 보리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료는 가지고 왔어요?" 보리밭 한가운데서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여리.
졸지에 갈 곳을 잃은 그들에게는
이제 이 보리밭이 임시거처이자 은신처이며 놀이터인 것이다.
보리인지 밀인지 모를 목초는 무릎 높이 이상으로 자라
고양이가 그 속에 들면
밖에서는 도저히 그곳에 고양이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나도 그곳에 고양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리밭 속에 웅크린 채 은신하고 있는 여리(위)와 대모(아래).
그런데 사료배달을 가서
축사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보리밭 여기저기서 파문이 일듯 보리가 일렁이는 거였다.
가만 들어보니 스사삭, 스삭 하면서 무언가 보리밭을 헤치고 오는 소리가 났다.
그 무언가는 저쪽에서부터 이쪽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또다른 무언가도 또다른 곳에서 이쪽으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보리 물결 너머로 보이는 장나니의 모습(위)과 가까이 다가온 장나니(아래).
축사고양이들이었다.
갈곳이 없어 녀석들은 이곳에 숨어든 것이었다.
대모는 전봇대 근처 보리밭에 웅크리고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장나니와 여리, 가만이는 각자 다른 곳에서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이 동네 왕초고양이 흰노랑이는 아직 나와의 대면이 익숙지 않아
나를 보자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가만가만 보리 물결 속을 걸어오는 가만이 녀석.
보리밭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달려가는 가만이.
이틀 정도 녀석들을 지켜본 바로는
축사가 철거되는 동안 축사고양이들은 내내
이곳에서 먹고, 놀고, 숨고, 자고, 쉬곤 했다.
당연히 나의 사료 배달도 배송지가 보리밭이거나 밭 가장자리로 바뀌었다.
보리밭 가에서 사료를 먹고 보리밭 한복판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는 녀석들.
이슬이 내리는 밤중에는 녀석들이 또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새로운 둥지를 구하기는 한건지도 모르겠다.
보리밭에서 만난 왕초고양이 흰노랑이. 대모가 낳은 6마리 아기고양이의 아빠냥이다.
대모가 낳은 6마리 새끼고양이가 안전한지도,
안전하게 옮겨져 잘 크는지도 알 수가 없다.
축사고양이의 현실은 축사의 철거와 함께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불확실한 미래.
그래도 보리밭을 거닐고 노니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낭만적으로만 보인다.
보리밭 가장자리, 사료를 먹기 위해 몰려든 고양이들.
그들의 슬픈 현실과는 무관하게
현재 그들의 모습은 그지없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놀아도 노는 게 아니고
낮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닌데,
그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 날 지경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갈아엎은 보리밭 위를 걷다가(위) 철거중인 축사 바깥을 돌아나가는 장나니(아래).
엊그제 다시 보리밭을 찾았을 때, 보리밭은 없었다.
이미 보리밭은 갈아엎은 뒤였다.
아마도 축사가 철거되었으니, 축사 가축에게 필요한 목초 또한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긴 축사를 철거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목초지까지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이곳 주인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뒤늦게 축사고양이 장나니는 갈아엎은 보리밭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밭가를 거닐며 철거되는 축사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본다.
축사도, 보리밭도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제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길고양이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고양이 꽃발라당 (36) | 2010.05.24 |
---|---|
올라오긴 했는데 (19) | 2010.05.23 |
이건 설정이 아닙니다 (13) | 2010.05.22 |
철창에서 풀려난 고양이 (36) | 2010.05.20 |
고양이 꽃잠 (34) | 2010.05.19 |
어느 고양이의 할머니 마중법 (36) | 2010.05.17 |
고양이 1 2 3 (16) | 2010.05.15 |
6마리 새끼고양이의 운명은? (27) | 2010.05.14 |
<길고양이 보고서>가 일본 독자와 만납니다 (37) | 2010.05.14 |
철창에 갇힌 고양이 (31) | 2010.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