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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25 폐차장 고양이의 독백 24
폐차장에서 보낸 한철
어디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장 난 자동차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했고,
먹이원정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엄마보다 먼저 지쳐 잠이 들었다.
나는 문짝이 떨어져나간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
눈 내리는 겨울밤을 보냈고
보닛에 올라앉아 봄날의 나른한 햇살을 맛보았다.
폐차장에서 보낸 한철.
이곳의 폐차장은 더 이상 폐차를 하는 곳도 아니었다.
그저 버려진 폐차장에 불과했다.
이곳에는 단순히 망가진 차들이 아니라
망가져서 오래된 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어떤 4륜구동 운전석에서는 이끼가 자라고
어떤 펑크 난 타이어에서는 꽃다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던 차들은
어딘가 한군데씩은 망가져서 이곳 폐차장으로 왔다.
저 차들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시처럼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냥냥거리던 추억의 한때가 있었던 것처럼.
엄마는 보닛이 찌그러진 소나타를 유난히 좋아했다.
원정을 다녀온 엄마는 가죽이 뜯겨 스펀지가 드러난 뒷좌석에
고단한 몸을 누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먼곳을 여행하고 왔을
록스타가 마음에 들었다.
이 망가진 차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늘 어느 멋진 숲길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자는 동안에만 꿈꿀 수 있었으므로
나는 무엇보다 잠자는 걸 좋아했다.
가끔 깨진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세찬 황소바람이 내 꿈을 깨우곤 했다.
“꿈꾸는 건 위험하다.
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고, 고양이에겐 꿈 따위가 필요없단다.
우리에겐 살아남아야 할 절박한 현실만이 중요하지.”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꿈만 꾸는 거잖아요.
그것도 안된다면 너무 슬프잖아요.”
나도 안다.
여긴 폐차장에 불과하고, 폐기된 것들은 잊혀진다는 것.
그러나 끝끝내 잊혀지지 않는 기억도 있는 법이다.
지난겨울이 시작될 무렵 엄마는 나를 데리고 정든 돌담집을 떠나 이리로 왔다.
매일 배달되는 돌담집 급식소의 먹이를 마다하고
엄마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엄마가 말하기를, 여리 이모는 돌담집 담장 아래 놓인
수상한 밥을 먹고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별로 떠났다고 한다.
그 수상한 밥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언제부턴가 엄마는 사료배달부마저 기피했다.
인간을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인간은 참 종잡을 수가 없는 존재다.
어떤 인간은 우리에게 사료를 내밀고,
어떤 인간은 우리에게 쥐약을 먹이고.
맨 처음 폐차장으로 이사왔을 때,
이곳을 영역으로 삼아온 개울집 노리 아저씨는 몇 번이나 우리를 쫓아내려 했다.
실제로 노리 아저씨에게 쫓겨서 개울 건너편 도로변을 헤매다 들어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엄마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차라리 이곳이 낫다. 거기서 죽는 것보다는 여기서 쫓기는 게 낫다.
어차피 이번 세상의 묘생은 죽지 않으면 쫓기는 거니까.”
그렇잖아도 우리가 터를 잡은 폐차장은 많은 고양이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다.
노리 아저씨는 그렇다 치고, 순둥이 아줌마와 승냥이 아줌마도
툭하면 이곳을 찾아와 엄마에게 으르렁거렸다.
한동안 엄마는 매일같이 만신창이가 돼 돌아왔다.
엄마는 그것이 영역동물의 숙명이라고 했다.
쫓아내지 않으면, 쫓겨나는 것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다정하고 친절했던 고양이도 있었다.
무럭이와 무던이, 무심이만은 우리를 이웃사촌으로 대해줬다.
어느 날 무럭이는 내가 숨어 있는 승용차 트렁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함께 놀지 않을래?”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가 폐차장에 자리를 잡고 혹한이 몰아칠 무렵
어떻게 알고 사료배달부도 이곳을 찾아와 사료를 내려놓고 갔다.
최소한 우리는 먹이 걱정은 던 셈이었다.
어느덧 폐차장에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보닛의 틈새로 냉이가 돋기 시작했다.
철망 밖 벚나무에는 수액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개울가엔 벌써 버들개지가 탐스럽게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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